끈기, 달콤하고 매력적인 단어다. 끝까지 버텨낸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웅적 메달과 성공의 찬란한 빛을 떠올리게 하는 마법 같은 말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단어가 마냥 좋게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단단한 사람’, ‘버티는 사람’으로 규정된 사람은 결코 돌봄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내 곁에 있는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얼마나 어두운 사각지대에 있는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일상적인 일에서 분명한 자유와 행복을 느끼는 반면, 생활 전반에는 ‘이완 후 붕괴’와 트라우마 반응을 그대로 안고 있다. 버티는 것만이 사명자의 유일한 정답인 줄 알았는데, 모든 역할이 끝나고 더 이상 버틸 당위성조차 사라진 순간, 내게 남은 것은 좋은 기억이 아니라 철저한 신체적·정신적 붕괴였다.
이번 추석 연휴에 그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난날들이 고단했으니 쉬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님도 없고, 마땅한 유대도 없어 눈치만 보이는 고향에는 구태여 내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 남았던 나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극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잠자리에 누워도 3시간쯤이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눈이 떠졌다. 당장 해결해야 할 사역도, 마주쳐야 할 사람도 없는 빈방이었지만 여전히 홀로 그 전쟁터에 있는 것처럼 내 손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익숙한 고립감의 탓이었을까, 마치 사역의 현장에 다시 투입된 듯했다. 해가 밝도록 잠에 들지 못했던 나는 연휴 이틀째, 어떻게든 머릿속을 끄고 이 깊은 불안과 고립감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정확히 새벽 3시 38분에 평생 마셔본 적 없던 술을 마셨다. 조금이나마 나를 자유롭게 해주길 바랐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찾아보니 ADHD 특성상 어설프게 취하면 뇌가 오히려 각성되어 생각이 명료해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잠은 달아났고 정신은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또렷해져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정말 불쾌한 기억이다.
‘외로움’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 공포로 깨닫게 된 나는, 지난 1년간의 기억들을 두고 끊임없이 반추했다. “내가 왜 그런 취급을 받아야 했을까”,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닐까”, “내가 기도를 덜 했나?”, “내가 묵상을 덜 했나?”, “순종하지 못했나?”, “내가 말을 못 하나?”, “나는 어쩌면 사람과 소통이 어려워지는 질환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뭐가 문제일까?” 쉴 새 없이 스스로를 심문했다. 무수한 상처와 하염없는 소진이 누구의 잘못도 아닌 공동체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룩’, ‘성령 충만’ 등으로 늘 표면적 승리만을 외치는 우리의 성격 탓일까. 모든 생각은 자책으로 이어졌다.
나는 간절히 낫고 싶다. 그렇기에 이번 학기 정신 질환에 대해서 배우는 ‘이상심리학’ 수업을 수강하고 있다. 이 수업에서 우리가 ‘거룩’으로 포장하는 종교적 사역 환경이 인간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알고리즘과 소름 돋을 정도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래는 아브람슨의 절망감 우울증 모델과 아론 벡의 인지 모델을 결합해 본 도식이다.

이 모델의 흐름을 짚어보면, 사역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이 왜 그토록 부서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필연적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역 현장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사역적 요구, 인력 부족, 구성원 간의 갈등과 같은 수많은 마찰이 일어난다. 일반적인 사회 조직이라면 이 스트레스의 원인을 구조적 결함이나 환경적 요인으로 돌려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다. 그러나 종교 공동체에서는 이 모든 사건이 ‘영적 훈련’이나 ‘믿음의 연단’이라는 언어로 치환되며 객관적인 해결과 통제의 기회가 원천 차단된다.
여기서 작동하는 것이 바로 ‘부정적 인지도식’과 ‘중간 신념(규칙/태도/기본 가정)’이다. 지도자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이미 단단한 종교적 규범이 자리 잡고 있다. “영적 리더는 무너져서는 안 된다”, “열매가 없는 것은 내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불신앙이다” 등의 신념이다.
이 도식이 활성화되는 순간 뇌는 가장 치명적인 ‘우울 유발적 귀인’을 선택한다.
- 내부적 귀인 : 공동체의 모순과 구조적 한계를 직시하지 못하고, “내가 죄인이라서”, “내가 덜 준비해서”라며 모든 원인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린다.
- 안정적 귀인 : 이 억울함과 고통스러운 대우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 믿는다.
- 전반적 귀인 : 사역의 버거움이 사역에서 멈추지 않고, “나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마저도 버거워하는 사람, 그래서 모든 것이 버거운 사람”이라는 잔인한 판결을 스스로에게 내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활성화된 도식은 들어오는 정보를 한쪽으로만 걸러 받아들이는 인지적 오류를 야기하고, 이는 자동적 사고(자기, 세상, 미래)로 이어진다. “결국 나는 무시당할 사람이고(자기), 공동체는 나를 끝없이 소모품으로만 대하며(세상), 사역이 끝나면 결국 나는 홀로 남을 것이다(미래)”라는 그릇된 생각이다.
이 생각들이 겹쳐져 도착할 곳은 단 하나밖에 없다. ‘절망감’이다. 아무리 애써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경험이 학습되어 ‘나아지지 않을 거야’라는 부정적 결과 기대와, 나에게는 이를 바꿀 어떤 힘과 자원도 없다는 무기력이 맞물려 인간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신체적으로 나타난다(대표적으로 우울증).
문제는 이 도식 안에서 ‘좋은 믿음’으로 착각되는 ‘끈기’가 이 비극적인 순환을 가속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고통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거나 관계를 끊어냈을 텐데, ‘영적 지도자’라는 족쇄는 ‘끈기’라는 우상을 빛나 보이게 한다. 이 순환을 탈출하는 것조차 ‘죄’이자 ‘패배’로 인식하게 하는 이 강력한 빛은, 한 개인이 완전히 타 가루가 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견디게 만든 가장 아름다운 맹독성 진통제였던 셈이다.
우리는 지도자를 언제나 은혜와 헌신을 무한정 날라주는 ‘공급자’로만 생각한다. 그들 역시 돌봄이 필요한 유한한 피조물인데도 말이다. 구성원의 아픔에는 쉼과 치유를 이야기하지만, 지도자의 무너짐 앞에서는 “묵상이나 해라”, “더 기도하라”, “네 믿음이 문제다”라며 끈기만을 종용한다. 그렇기에 지도자는 더더욱 공동체의 신뢰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피 흐르는 상처를 애써 가리며 단단함을 연기한다. 결국 구성원들은 “지도자니까”, “늘 그렇듯 알아서 잘 할 테니까”라는 맹목적인 신뢰 속에 그를 방치한다. 영적 지도자는 누구보다 빛나 보이지만, 실상은 공동체의 가장 춥고 어두운 사각지대에 서 있다.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는 스스로를 태워 시스템을 유지하는 맹목적 끈기가 결코 아니다. 인간의 한계와 무력함을 인정하고, 마치 엘리야가 탈진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그저 잠과 한 조각의 떡이었듯, ‘영적 지도자’ 또한 한낱 피조물임을 그와 우리가 모두 인정할 때 비로소 지도자들은 숨을 쉴 수 있다.
끈기, 그 달콤한 우상이 더 이상 그 어떤 ‘영적 지도자’도 옭아매지 않길 기도할 따름이다. 모두가 자신의 지도자 곁에, 설령 그가 짊어진 압박을 다 알지 못하더라도, 그저 머물러 주고 함께 고민해 주길 눈물로 기도할 따름이다. 이 글은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위로이기도 하면서, 앞으로 있을 이들에게 주고픈 위로와 지지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나는 앞으로 있을 모든 ‘영적 지도자’들이 더 이상 외로움과 괴로움을 상처로 안은 채 두려움에 떨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처럼 모두가 미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당신에게는 가장 가까이에 기댈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 필요했던 그때, 누군가 내게 “봐봐, 성경도, 저명한 심리학자들도 그렇게 말하잖아. 많이 힘들었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 주었다면 조금은 나았을까? 내게 필요했던 이러한 따뜻한 말을 나 자신에게,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기를.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히브리서 13:17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 시편 1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