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xml:lang="ko"><generator uri="https://jekyllrb.com/" version="3.10.0">Jekyll</generator><link href="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feed.xml"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link href="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lang="ko" /><updated>2026-10-18T20:39:52+09:00</updated><id>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feed.xml</id><title type="html">Hong-Iron</title><subtitle>프로젝트, 지식 DB, 나의 팡세를 한곳에 모읍니다.</subtitle><author><name>Hong-Iron</name></author><entry><title type="html">나도 이스라엘</title><link href="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10/05/i-am-israel-too/" rel="alternate" type="text/html" title="나도 이스라엘" /><published>2026-10-05T03:49:00+09:00</published><updated>2026-10-05T03:49:00+09:00</updated><id>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10/05/i-am-israel-too</id><content type="html" xml:base="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10/05/i-am-israel-too/"><![CDATA[<p>27   그러나 <strong>요셉</strong>이 한 말을 아들들에게서 모두 전해 듣고, 또한 요셉이 자기를 데려오라고 보낸 그 수레들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 야곱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br />
28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니! 암, 가고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 하고 <strong>이스라엘</strong>은 중얼거렸다.</p>

<p><strong>(창세기 45장)</strong></p>

<hr />

<h2 id="야곱과-이스라엘">야곱과 이스라엘</h2>

<p>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는 자”다. 거짓말하는 자, 스스로의 꾀와 힘으로 살아가려는 자, 곧 한 사람의 ‘나’를 가리킨다. (우리 개개인)</p>

<p>반면 그의 새 이름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겼다’는 말은 정말 하나님을 상대로 이겨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압도(창 32:25, 원어적 표현) 하지 않으심으로, 곧 져 주심으로 긍휼을 입었다는 의미가 훨씬 크다.</p>

<p>성경은 이 두 이름을 자주 섞어 쓴다. 창세기 49장에서는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이기도 한다.</p>

<blockquote>
  <p>2   <strong>야곱</strong>의 아들들아, 너희는 모여서 들어라. 너희의 아버지 <strong>이스라엘</strong>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p>

  <p>— 창세기 49장</p>
</blockquote>

<p>이상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부르실 것이라 약속하셨는데도(창 32:28), 성경은 왜 끝까지 한 사람을 두 이름으로 부를까?</p>

<p>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개개인(야곱)을 당신의 백성, 사랑의 대상, 그리고 무엇보다 기꺼이 져 주고 싶은 이(이스라엘)로 보시기 때문이다.</p>

<p>성경은 하나님 눈에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이스라엘을 굳이 야곱이라 거듭 부르며 우리의 약함을 비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영생을 약속받았지만, 삶이 끝나는 날까지 죄성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죄인이고, 성경은 이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롬 7:22~23, 마 26:41, 요일 1:8).</p>

<p>하지만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언제나 이스라엘이다. 그분은 우리의 체질을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도(시 103:13~14) 그리스도 예수를 구태여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져 주셨고’, 우리의 죄성을 파멸이 아니라 은혜를 빛내는 통로로 삼으셨다(롬 5:20).</p>

<hr />

<h2 id="이스라엘과-언약">이스라엘과 언약</h2>

<p>창세기 45장. 요셉을 잃고 베냐민마저 잃었다고 생각한 노인 “야곱”은,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러다 요셉이 한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정신을 되찾는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성경은 그를 “이스라엘”이라 부른다.</p>

<p>“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언약과 뗄 수 없다. 벧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다 이루기까지 그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다(창 28:15). 요셉을 잃은 약 22년 동안 그 약속은 끊어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이 전하는 하나님으로 가득 찬 이야기와, 눈앞의 수레를 통해 하나님이 한 번도 그를 떠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이어지는 46장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다며 약속을 확인해 주신다(46:3~4).</p>

<hr />

<h2 id="이스라엘이라-불릴-때">이스라엘이라 불릴 때</h2>

<p>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의 믿음이 충만해야만 “이스라엘”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p>

<blockquote>
  <p>6   <strong>이스라엘이 자식들을 탓하였다</strong>. “어찌하려고 너희는, 아우가 있다는 말을 그 사람에게 해서, 나를 이렇게도 괴롭히느냐?”<br />
…<br />
14   너희들이 그 사람 앞에 설 때에, <strong>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게 해주시기를 빌 뿐이다.</strong> 그가 거기에 남아 있는 아이와 베냐민도 너희와 함께 돌려 보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는 것이지, 난들 어떻게 하겠느냐?”</p>

  <p>— 창세기 43장</p>
</blockquote>

<p>기근은 점점 심해지고, 애굽의 총리(요셉)는 막내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는다면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했다. 막내마저 내줘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아들들에게 원망을 쏟아낸다(43:6). 그런데 성경은 이 원망하는 노인을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부른다. 우리의 눈에는 너무나 연약한 “야곱”의 모습인데, 왜 “이스라엘”로 불렸을까?</p>

<p>14절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야곱이 끝에는 하나님께 다시 매달렸기 때문이다(43:14).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야곱은 다시 한번 벧엘에서 하나님이 스스로를 소개하신 이름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을 언급하며 매달렸다.</p>

<p>“이스라엘”은 점잖은 기도가 아닌 고관절의 뼈가 어긋나는 씨름으로 얻어낸 이름이기도 하다. 야곱이 믿음이 충만해서 “이스라엘”이라 불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흔들리고 무너지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그 이름을 한 번도 거두지 않으셨기에, 그는 다시 매달릴 수 있었고 여전히 “이스라엘”이다.</p>

<hr />

<h2 id="이스라엘로-불리는-감격">이스라엘로 불리는 감격</h2>

<p>이 묵상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다. 그저 좋은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창세기 45장의 말씀을 마침내 붙들었을 때,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한 놀라운 묵상이었다. 그래서 이를 기록해 두려 한다.</p>

<p>요즘 마음속에 괴리가 있다. 외롭고 괴로운데, 막상 누군가에게 이 마음을 꺼내 놓으려 하면 또 상처받을까 망설여진다. 마음을 내보였다가 가볍게 여겨지고 아프지 않은 척 돌아서야 했던 기억들이 아직 깊숙히 남아 있는 모양이다. 다시 손을 내밀었는데 여전히 아무도 잡아 주지 않으면 어쩌나, 그게 겁이 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공동체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다. 순방에도 뜸해졌고, 마음이 지쳐 채플과 리트릿도 한 번 쉬어 갔다.</p>

<p>2층 침대에 새카만 커튼을 달았고, 그 안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할까 봐 속마음은 잘 꺼내지 않게 되었다. 담담한 말투와 늘 같은 표정이 나를 지켜 줄 거라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아직 누군가에게 마음 편히 기대어 울어 본 적이 없다.</p>

<p>그래서 내가 무한히 솔직해질 수 있는 구석, 기댈 구석이 말씀밖에 없다. 이처럼 나의 심령이 가난한 탓일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야곱과 같은 나를 이스라엘로 봐 주신다는 사실에 눈물이 흘렀다. 내게 구원의 언약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셨다.</p>

<p>야곱에게 수레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고후 1:20).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름을 끝내 거두지 않으시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p>

<p>내 삶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나타나실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의 “요셉”이 언제 어디서 누구로 나타날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나를 “이스라엘”로 보시는 하나님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끝까지 찾는 목자의 사랑으로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확신이 조금씩 빛을 찾아가기 시작한다.</p>

<p>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하시는 일이 분명 있지만, 요즘은 나와 단둘이 계신다. 내가 아무리 두려워 떨고 있어도 나를 “이스라엘”이라 불러주신다. 내가 아무리 회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버리지 않으신다.</p>

<p>할렐루야. 새카만 커튼으로 둘러싼 나의 요새 안에, 하나님은 오늘 나와 함께 누워 계신다.</p>]]></content><author><name>Hong-Iron</name></author><category term="pensees" /><category term="야곱" /><category term="언약" /><summary type="html"><![CDATA[하지만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언제나 이스라엘이다.]]></summary><media:thumbnail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og/site.png" /><media:content medium="image"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og/site.png"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entry><entry><title type="html">Tenacity</title><link href="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9/30/tenacity/" rel="alternate" type="text/html" title="Tenacity" /><published>2026-09-30T07:24:00+09:00</published><updated>2026-09-30T07:24:00+09:00</updated><id>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9/30/tenacity</id><content type="html" xml:base="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9/30/tenacity/"><![CDATA[<p>끈기, 달콤하고 매력적인 단어다. 끝까지 버텨낸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웅적 메달과 성공의 찬란한 빛을 떠올리게 하는 마법 같은 말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단어가 마냥 좋게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단단한 사람’, ‘버티는 사람’으로 규정된 사람은 결코 돌봄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내 곁에 있는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얼마나 어두운 사각지대에 있는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p>

<p>최근 나는 일상적인 일에서 분명한 자유와 행복을 느끼는 반면, 생활 전반에는 ‘이완 후 붕괴’와 트라우마 반응을 그대로 안고 있다. 버티는 것만이 사명자의 유일한 정답인 줄 알았는데, 모든 역할이 끝나고 더 이상 버틸 당위성조차 사라진 순간, 내게 남은 것은 좋은 기억이 아니라 철저한 신체적·정신적 붕괴였다.</p>

<p>이번 추석 연휴에 그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난날들이 고단했으니 쉬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님도 없고, 마땅한 유대도 없어 눈치만 보이는 고향에는 구태여 내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 남았던 나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극명하게 깨닫게 되었다.</p>

<p>잠자리에 누워도 3시간쯤이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눈이 떠졌다. 당장 해결해야 할 사역도, 마주쳐야 할 사람도 없는 빈방이었지만 여전히 홀로 그 전쟁터에 있는 것처럼 내 손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익숙한 고립감의 탓이었을까, 마치 사역의 현장에 다시 투입된 듯했다. 해가 밝도록 잠에 들지 못했던 나는 연휴 이틀째, 어떻게든 머릿속을 끄고 이 깊은 불안과 고립감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정확히 새벽 3시 38분에 평생 마셔본 적 없던 술을 마셨다. 조금이나마 나를 자유롭게 해주길 바랐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찾아보니 ADHD 특성상 어설프게 취하면 뇌가 오히려 각성되어 생각이 명료해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잠은 달아났고 정신은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또렷해져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정말 불쾌한 기억이다.</p>

<p>‘외로움’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 공포로 깨닫게 된 나는, 지난 1년간의 기억들을 두고 끊임없이 반추했다. “내가 왜 그런 취급을 받아야 했을까”,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닐까”, “내가 기도를 덜 했나?”, “내가 묵상을 덜 했나?”, “순종하지 못했나?”, “내가 말을 못 하나?”, “나는 어쩌면 사람과 소통이 어려워지는 질환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뭐가 문제일까?” 쉴 새 없이 스스로를 심문했다. 무수한 상처와 하염없는 소진이 누구의 잘못도 아닌 공동체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룩’, ‘성령 충만’ 등으로 늘 표면적 승리만을 외치는 우리의 성격 탓일까. 모든 생각은 자책으로 이어졌다.</p>

<p>나는 간절히 낫고 싶다. 그렇기에 이번 학기 정신 질환에 대해서 배우는 ‘이상심리학’ 수업을 수강하고 있다. 이 수업에서 우리가 ‘거룩’으로 포장하는 종교적 사역 환경이 인간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알고리즘과 소름 돋을 정도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래는 아브람슨의 절망감 우울증 모델과 아론 벡의 인지 모델을 결합해 본 도식이다.</p>

<figure><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tenacity-1.png" alt="이 모델이 너무나 잘 적용된다." loading="lazy" /><figcaption>이 모델이 너무나 잘 적용된다.</figcaption></figure>

<p>이 모델의 흐름을 짚어보면, 사역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이 왜 그토록 부서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필연적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p>

<p>사역 현장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사역적 요구, 인력 부족, 구성원 간의 갈등과 같은 수많은 마찰이 일어난다. 일반적인 사회 조직이라면 이 스트레스의 원인을 구조적 결함이나 환경적 요인으로 돌려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다. 그러나 종교 공동체에서는 이 모든 사건이 ‘영적 훈련’이나 ‘믿음의 연단’이라는 언어로 치환되며 객관적인 해결과 통제의 기회가 원천 차단된다.</p>

<p>여기서 작동하는 것이 바로 ‘부정적 인지도식’과 ‘중간 신념(규칙/태도/기본 가정)’이다. 지도자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이미 단단한 종교적 규범이 자리 잡고 있다. “영적 리더는 무너져서는 안 된다”, “열매가 없는 것은 내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불신앙이다” 등의 신념이다.</p>

<p>이 도식이 활성화되는 순간 뇌는 가장 치명적인 ‘우울 유발적 귀인’을 선택한다.</p>
<ol>
  <li>내부적 귀인 : 공동체의 모순과 구조적 한계를 직시하지 못하고, “내가 죄인이라서”, “내가 덜 준비해서”라며 모든 원인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린다.</li>
  <li>안정적 귀인 : 이 억울함과 고통스러운 대우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 믿는다.</li>
  <li>전반적 귀인 : 사역의 버거움이 사역에서 멈추지 않고, “나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마저도 버거워하는 사람, 그래서 모든 것이 버거운 사람”이라는 잔인한 판결을 스스로에게 내리게 된다.</li>
</ol>

<p>뿐만 아니라, 활성화된 도식은 들어오는 정보를 한쪽으로만 걸러 받아들이는 인지적 오류를 야기하고, 이는 자동적 사고(자기, 세상, 미래)로 이어진다. “결국 나는 무시당할 사람이고(자기), 공동체는 나를 끝없이 소모품으로만 대하며(세상), 사역이 끝나면 결국 나는 홀로 남을 것이다(미래)”라는 그릇된 생각이다.</p>

<p>이 생각들이 겹쳐져 도착할 곳은 단 하나밖에 없다. ‘절망감’이다. 아무리 애써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경험이 학습되어 ‘나아지지 않을 거야’라는 부정적 결과 기대와, 나에게는 이를 바꿀 어떤 힘과 자원도 없다는 무기력이 맞물려 인간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신체적으로 나타난다(대표적으로 우울증).</p>

<p>문제는 이 도식 안에서 ‘좋은 믿음’으로 착각되는 ‘끈기’가 이 비극적인 순환을 가속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고통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거나 관계를 끊어냈을 텐데, ‘영적 지도자’라는 족쇄는 ‘끈기’라는 우상을 빛나 보이게 한다. 이 순환을 탈출하는 것조차 ‘죄’이자 ‘패배’로 인식하게 하는 이 강력한 빛은, 한 개인이 완전히 타 가루가 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견디게 만든 가장 아름다운 맹독성 진통제였던 셈이다.</p>

<p>우리는 지도자를 언제나 은혜와 헌신을 무한정 날라주는 ‘공급자’로만 생각한다. 그들 역시 돌봄이 필요한 유한한 피조물인데도 말이다. 구성원의 아픔에는 쉼과 치유를 이야기하지만, 지도자의 무너짐 앞에서는 “묵상이나 해라”, “더 기도하라”, “네 믿음이 문제다”라며 끈기만을 종용한다. 그렇기에 지도자는 더더욱 공동체의 신뢰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피 흐르는 상처를 애써 가리며 단단함을 연기한다. 결국 구성원들은 “지도자니까”, “늘 그렇듯 알아서 잘 할 테니까”라는 맹목적인 신뢰 속에 그를 방치한다. 영적 지도자는 누구보다 빛나 보이지만, 실상은 공동체의 가장 춥고 어두운 사각지대에 서 있다.</p>

<p>성경이 말하는 십자가는 스스로를 태워 시스템을 유지하는 맹목적 끈기가 결코 아니다. 인간의 한계와 무력함을 인정하고, 마치 엘리야가 탈진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그저 잠과 한 조각의 떡이었듯, ‘영적 지도자’ 또한 한낱 피조물임을 그와 우리가 모두 인정할 때 비로소 지도자들은 숨을 쉴 수 있다.</p>

<p>끈기, 그 달콤한 우상이 더 이상 그 어떤 ‘영적 지도자’도 옭아매지 않길 기도할 따름이다. 모두가 자신의 지도자 곁에, 설령 그가 짊어진 압박을 다 알지 못하더라도, 그저 머물러 주고 함께 고민해 주길 눈물로 기도할 따름이다. 이 글은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위로이기도 하면서, 앞으로 있을 이들에게 주고픈 위로와 지지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나는 앞으로 있을 모든 ‘영적 지도자’들이 더 이상 외로움과 괴로움을 상처로 안은 채 두려움에 떨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처럼 모두가 미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당신에게는 가장 가까이에 기댈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p>

<p>정말 필요했던 그때, 누군가 내게 “봐봐, 성경도, 저명한 심리학자들도 그렇게 말하잖아. 많이 힘들었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 주었다면 조금은 나았을까? 내게 필요했던 이러한 따뜻한 말을 나 자신에게,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기를.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p>

<blockquote>
  <p>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p>

  <p>— 히브리서 13:17</p>
</blockquote>

<blockquote>
  <p>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p>

  <p>— 시편 103:14</p>
</blockquote>]]></content><author><name>Hong-Iron</name></author><category term="pensees" /><category term="끈기" /><category term="영적 지도자" /><summary type="html"><![CDATA[영적 지도자는 누구보다 빛나 보이지만, 실상은 공동체의 가장 춥고 어두운 사각지대에 서 있다.]]></summary><media:thumbnail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uploads/tenacity-1.png" /><media:content medium="image"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uploads/tenacity-1.png"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entry><entry><title type="html">힘을 빼 보려고</title><link href="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9/18/loosening-my-grip/" rel="alternate" type="text/html" title="힘을 빼 보려고" /><published>2026-09-18T01:02:00+09:00</published><updated>2026-09-18T01:02:00+09:00</updated><id>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9/18/loosening-my-grip</id><content type="html" xml:base="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9/18/loosening-my-grip/"><![CDATA[<p>이따금 가슴 한편이 아파온다. 누가 콕 찌르듯 잠이 달아나는 아픔이다. 잠이 오지 않아 펜을 들고 생각을 쏟아낸다.</p>

<p>최근에 한 순장님이 내게 “늘 단답으로 대답해서 친해지기 어려워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긴 숙고보다 직관적인 판단과 검토를 선호하는 탓일까. 상대방의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결론과 피드백이 완결되곤 한다. 유유히 흐르는 하천보다 강하게 내리꽂는 폭포 같은 나의 ‘단답’이, 누군가에게는 큰 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p>

<p>2023년 2월, 인천국제공항에 발을 디디던 나와 내 친구 수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와 닮은 피부색을 한 ‘외국인’들이 다니던 생소한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벌써 한국에 거주한 지 4년 가까이 되었다.</p>

<p>초등학교 2학년 때 이미 교회 도서관 대부분의 책들을 소화해냈기에, 평생토록 내게 한국어로 소통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떠올려본 적 없었다. 글쓰기 수업에서 C+를 받았을 때도, 인정하기 싫어 프로젝트 글쓰기를 수강하고 또다시 C+를 받았을 때에도 분명 무언가 오차가 있을 거라고, 나의 표현이 그저 교수님들의 취향에 걸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넘겨짚고 나의 언어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글과 말은 마치 눈빛과 손짓의 차이와 같아서, 미묘하면서도 매우 선명하게 달랐다.</p>

<p>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의 말하는 방식이 조금은 어려울지 몰라도 큰 오류가 없다고 믿었다. 문어체를 그대로 옮긴 듯한 나의 언어는, 적어도 내가 자란 곳에서만큼은 ‘올바른 한국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조금은 치사하지만, 오늘 나의 문제를 지나온 삶의 배경의 탓으로 슬그머니 돌려보고자 한다.</p>

<p>둥글게 앉아 이야기꽃을 피워도, 마치 혼자만 비눗방울 속에 갇혀 먹먹해진 소리를 듣는 것 같은 매일이었다. 사투리를 들어도 사투리인 줄 몰랐던 나는, 일상적인 단어들이 얕다고 생각해 늘 사람들의 말 뒤에 숨은 본래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가 ‘고맥락 사회’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온 탓에 그런 의심을 품고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표정으로, 눈빛으로 겨우 대화의 맥락을 파악할 뿐이었다. 침묵과 관찰, 그것은 다름에서 오는 외로움이 싫어 내가 둘러친 나름의 갑옷이었을지도 모른다.</p>

<p>말을 할 때에는 최대한 많은 상황에 공감되도록 휘황찬란한 단어를 택하여 보기도 했고, 화려한 조사, 부사와 형용사로 말을 치장해 보기도 했다. 서사를 부여해서 이야기해보았고, 비유를 활용해 보기도 했다. 침묵과 관찰이 나의 갑옷이었다면, 이런 수사학적 접근들이 내가 아는 유일한 무기였다. 날이 잘 드는 칼인 줄 알았던 나의 말은, 무디고 둔탁해 매번 내가 강하게 내려칠 따름이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껏 말을 많이 하면 전해지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p>

<p>많은 말로 나의 동역자들에게 상처 입히고 나서야 비로소 이런 일이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p>

<blockquote>
  <p>22   모세는 이집트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서, 그 하는 말과 하는 일에 능력이 있었습니다.<br />
23   모세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에, 그의 마음에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의 사정을 살펴 볼 생각이 났습니다.<br />
24   어느 날 그는 자기 동족 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의 편을 들어, 이집트 사람을 때려 죽여서, 압박받는 사람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br />
<strong>25</strong>   <strong>그는 동포가 하나님이 자기 손을 빌어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strong><br />
26   이튿날 모세는 동족들끼리 서로 싸우는 자리에 나타나서, 그들을 화해시키려고 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들아, 그대들은 한 형제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서로 해하는가?’ 하였습니다.<br />
<strong>27</strong>   <strong>그런데 동료에게 해를 입히던 사람이 모세를 떠밀고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strong><br />
<strong>28</strong>   <strong>어제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또 나를 그렇게 죽이려 하는가?’</strong><br />
29   이 말을 듣고서, 모세는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p>

  <p>— 사도행전 7장</p>
</blockquote>

<p>위 말씀은 스데반이 한 말이다. 모세는 고등 교육을 받아 지혜와 능력을 갖추었지만, 그의 의도가 자기 민족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을까? 그는 하나님이 자기 손을 빌려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여 주신다 믿었으나, 그 손을 폭력의 도구로 사용했다.  이튿날 그가 건넨 말은 온당했으나, 주먹에 가려졌다.<br />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건네려던 말이 옳았어도, 그보다 먼저 세게 내려친 내 말들에 가려지곤 했다.</p>

<blockquote>
  <p>8   “너는 지팡이를 잡아라. 너와 너의 형 아론은 회중을 불러모아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strong>저 바위에게 명령하여라</strong>. 그러면 그 바위가 그 속에 있는 물을 밖으로 흘릴 것이다. 너는 바위에서 물을 내어, 회중과 그들의 가축 떼가 마시게 하여라.”<br />
9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대로, 주님 앞에서 지팡이를 잡았다.<br />
10   모세와 아론은 <strong>총회를 바위 앞에 불러모았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strong> “반역자들은 들으시오. 우리가 이 바위에서, 당신들이 마실 물을 나오게 하리오?”<br />
11   모세는 팔을 높이 들고, 그의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쳤다. 그랬더니 많은 물이 솟아나왔고, 회중과 그들의 가축 떼가 마셨다.<br />
12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총회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p>

  <p>— 민수기 20장</p>
</blockquote>

<p>그뿐만 아니라, 모세는 지팡이를 들었지만 명하신 대로 쓰지는 않았다. 바위에게 명령하라 하셨는데도 모세는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고 바위를 두 번이나 힘껏 내리쳤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도구를 폭력의 도구로 바꾼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이행했으니 약속하신 열매를 주셨을지라도, 분노로 이행했으니 하나님 눈에 어떻게 좋게 보였을까. 내 말도 그랬다. 세게 내려친 말은 나와 동역자들 누구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했다. 열매만이 능사가 아니었다.</p>

<blockquote>
  <p>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br />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br />
3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br />
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br />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p>

  <p>— 고린도전서 2장</p>
</blockquote>

<p>바울이 다른 길을 보여 준다. 나와 모세처럼 확신, 지혜와 힘을 믿고 내려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채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다가가는 것이 낫다고 몸소 가르쳐 주었다. 이제 나도 오해만 부르던 침묵과 관찰이라는 갑옷을 내려놓고 날카롭다고 믿었던 무딘 나의 말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왔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신뢰와 지혜의 옷을 입고,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혀를 기대할 뿐이다.</p>]]></content><author><name>Hong-Iron</name></author><category term="pensees" /><category term="말" /><category term="모세" /><summary type="html"><![CDATA[지금껏 말을 많이 하면 전해지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summary><media:thumbnail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og/site.png" /><media:content medium="image"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og/site.png"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entry><entry><title type="html">손을 펴는 연습</title><link href="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9/09/practicing-open-hands/" rel="alternate" type="text/html" title="손을 펴는 연습" /><published>2026-09-09T16:34:00+09:00</published><updated>2026-09-09T16:34:00+09:00</updated><id>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9/09/practicing-open-hands</id><content type="html" xml:base="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9/09/practicing-open-hands/"><![CDATA[<blockquote>
  <p>2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요, 또 한 아내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br />
3   엘가나는 매년 한 번씩 자기가 사는 성읍에서 실로로 올라가서, 만군의 주님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다. 그 곳에는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주님의 제사장으로 있었다.<br />
4   엘가나는 제사를 드리고 나서는, 늘 아내 브닌나와 그가 낳은 모든 아들딸에게 제물을 각각 한 몫씩 나누어 주곤 하였다.<br />
5   그러나 한나에게는 두 몫을 주었다. 비록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지만,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하였다.<br />
6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다.<br />
7   이런 일이 매년 거듭되었다. 한나가 주님의 집으로 올라갈 때마다, 브닌나가 한나의 마음을 늘 그렇게 괴롭혔으므로,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br />
8   그럴 때마다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위로하였다. “여보,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 않으려 하오? 왜 늘 그렇게 슬퍼만 하는 거요?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p>

  <p>— 사무엘상 1장 (새번역)</p>
</blockquote>

<p>사람을 대하는 것,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다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이 본문을 읽기 전까지는 이 두 가지 영역이 서로 다른 영역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인간관계 또한 마치 수학이나 코딩 문제처럼 ‘충분히 관찰하고 노력을 들이면 풀 수 있는 문제’ 정도로 보았습니다. 제게 ‘문제’라는 단어는 대부분 목적이었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였고, 더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일절 담겨있지 않았고, 다만 무언가를 실행했을 때 일어나는 일들의 가능성을 보고자 했던 강한 의지였습니다. 엘가나 또한 저와 비슷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p>

<p>하지만 성경은 한나의 입장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따라가 볼 때, 엘가나와 저의 생각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한나는 불임으로 인한 수치심, 정체성의 몰락, 가정 내 폭력(브닌나로부터) 등을 당하며 어디에도 안전지대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아마</p>

<p>1. 그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 (타자의 존재론적 확증)<br />
2. 폭력의 원인을 냉정하게 차단하는 것 (보호)<br />
3. 그녀에게 위안을 주려 하기보다 위안을 함께 찾고 기다리는 것 (하나님으로의 시선 재배치)</p>

<p>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엘가나는 전혀 다른 방법을 택합니다.</p>

<p>성경에 적혀있는 것을 볼 때, 엘가나는 별다른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습니다. 엘가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br />
“여보, <strong>왜</strong> 울기만 하오? <strong>왜</strong> 먹지 않으려 하오? <strong>왜</strong> 늘 그렇게 슬퍼만 하는 거요? <strong>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strong>” 우리는 이 짧은 내용만으로도 많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p>

<p><strong>1. 결핍을 채우는 수단으로 자신을 제시함 (나르시시즘) :</strong> 한나에게 필요했던 건 ‘아들’ 이었습니다.<br />
<strong>2. 눈물을 닦아주기보다 다그침 (자아상의 방어) :</strong>  엘가나는 한나에게 “왜” 라며 세 번이나 다그칩니다. 이 다그침은 안타까움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고대 문화를 고려했을 때 언뜻 엘가나 자신의 무력함으로 비칠 수 있는 한나의 슬픔이 당장 멈추길 기대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br />
<strong>3. 슬픔의 자리와 시간을 빼앗음 (거울상적 자아도취) :</strong> 엘가나는 한나에게 끝에 아들 열 명보다 내가 낫지 않느냐 라고 묻습니다. 한나는 그 자리에서 “아닙니다. 아들 열 명이 더 낫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엘가나가 기대했던 대답은 당연하게도, “네, 아들 열 명보다 당신이 더 낫습니다.” 였을 겁니다. 자아상의 방어에 연계로 한나를 통한 거울상적 자아를 확증 받고픈 그의 나르시시즘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럴 때, 위로받아야 할 대상이 한나에게서 엘가나로 뒤집히며 한나는 더 깊은 고립감에 빠지게 됩니다.</p>

<hr />

<p>최근 “라캉”이라는 정신 분석 학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 저의 구조적인 사고방식이 이해하기 좋게 만들어져 있어, 그의 사고와 표현을 빌려 묵상을 실행까지 이어가 보고자 합니다. 라캉의 세계에는 ‘상상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상상계는 ‘이상적인 나’와 타자를 비추는 ‘거울’의 세계입니다.</p>

<p>가령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약 12~18개월)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이 아이는 스스로 밥을 먹지도, 의미를 가진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마음껏 뛰거나 춤추지도 못할 겁니다. 이 아이에게 ‘감각’ 이란 파편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거울을 들여다볼 때, 거울에 비친 아이의 모습은 온전합니다. 있어야 할 곳에 몸의 각 기관들이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때 아이는 “아, 이 완전한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라며 착각합니다. 라캉의 세계에서 자아는 이러한 ‘착각’입니다.</p>

<p>이러한 ‘착각’의 렌즈가 관계에 적용될 때, 몇 가지 오류를 야기합니다.<br />
<strong>1. 타자를 독립된 인격이 아닌 거울로 대함 :</strong> 타인을 내 능력, 가치, 도덕성 등을 확인받기 위한 거울로 소비함. 즉, 나의 행동이 상대에게 야기하는 결과를 통해 보는 자신의 이미지를 갈망하는 것.<br />
<strong>2. 거울상적 경쟁(1:1 대립) :</strong> 상상계 속에서는 질서보다 상대적 기준만 존재함. 즉, 누가 더 위에 있는지, 누가 더 정답인지를 두고 끊임없이 비교하게 됨.<br />
<strong>3. 결핍을 오류로 보는 완벽주의 :</strong> 엘가나가 “내가 낫지 않냐”, “왜 우냐”라며 성급하게 굴었던 것처럼 자신이나 상대방에게서 발견되는 실패를 견디지 못하고 통제하려 듦.</p>

<hr />

<p>저는 아무도 이런 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정도의 차이는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저를 예시로 들었을 때, 제 상상계는 제게 있어서 매우 실제적입니다. 한 마디로, 고집이 매우 세고 거울 세계 속 착각에 빠져 산다는 뜻이죠.</p>

<p>제 신경학적 특성 또한 한몫합니다. ADHD의 두뇌는 문제 해결이 곧 가장 빠른 도파민 결핍의 해결책이라 여기고, 전두엽의 억제력이 낮고, 미해결된 무언가가 있을 때 이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이를 견디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에 극도로 예민하기 때문에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감지하는 순간 방어기제가 의지와 상관없이 발동되어 버립니다.</p>

<p>참 피곤하게 태어났습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장애였다면 스스로도 한계를 매 순간 통감해 행동을 적절히 하고, 상대방들도 각자의 기대치를 조정할 텐데 말입니다. 뇌, 정신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해당하는 차이이다 보니 스스로도 모른 채로 오랜 시간을 지냈고 다른 이들도 알 수 없습니다.</p>

<p>이렇게 또다시 낙심할 때쯤, 하나님께서 한나의 이야기를 통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p>

<blockquote>
  <p>10   한나는 괴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였다.<br />
11   한나는 서원하며 아뢰었다.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저를 기억하셔서, 주님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br />
12   한나가 주님 앞에서 계속 기도를 드리고 있는 동안에, 엘리는 한나의 입술을 지켜보고 있었다.<br />
13   한나가 마음 속으로만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로 생각하고,<br />
14   그를 꾸짖었다. “언제까지 술에 취해 있을 것이오? 포도주를 끊으시오.”<br />
15   한나가 대답하였다. “제사장님, 저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저의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았을 뿐입니다.<br />
16   이 종을 나쁜 여자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나도 원통하고 괴로워서, 이처럼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br />
17   그러자 엘리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오.”<br />
18   한나가 대답하였다. “제사장님, 이 종을 좋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한나는 그 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p>

  <p>— 사무엘상 1장</p>
</blockquote>

<p>17절 엘리의 대답은 원어상 미완료형 문장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이 미완료형 문장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한나는 곧바로 괜찮아졌습니다. 그녀에게 막연한 “해주시리라”라는 믿음이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br />
15절, 한나는 자신을 주님 앞에서 쏟아놓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쏟아 놓았다’라는 표현은 원어로 ‘샤파크’ 즉, 부어버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그녀는 온전히 있는 그대로, 하나님을 설득하려 하기보다 다만 드리려 했습니다.<br />
11절에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서원합니다. 이 서원이 의미 있는 이유는, 한나가 아직 아이를 갖기 전에 이미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결핍으로부터 시작했을지 몰라도 결핍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p>

<p>제가 문제라 여기던 것들, 그것들을 만드는 환경이나 형질은 남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해결되기 전에, 한나가 그러했듯, 손을 펴는 것을 연습해보려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상처입혔던 사람이, 나를 상처입혔던 사람이, 상처 입혔던 내가 문제가 아니었다 라는 사실을 조금은 알게 될까 싶습니다.</p>

<blockquote>
  <p>10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내가 뭇 나라로부터 높임을 받는다. 내가 이 땅에서 높임을 받는다.</p>

  <p>— 시편 46편</p>
</blockquote>]]></content><author><name>Hong-Iron</name></author><category term="pensees" /><category term="한나" /><category term="라캉" /><summary type="html"><![CDATA[사람을 대하는 것,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다릅니다.]]></summary><media:thumbnail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og/site.png" /><media:content medium="image"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og/site.png"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entry><entry><title type="html">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title><link href="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9/01/by-their-fruits/" rel="alternate" type="text/html" title="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published>2026-09-01T22:41:00+09:00</published><updated>2026-09-01T22:41:00+09:00</updated><id>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9/01/by-their-fruits</id><content type="html" xml:base="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9/01/by-their-fruits/"><![CDATA[<p>개강을 맞이하고 비정형화된 삶을 다시금 살아가게 되니, 얼마나 황홀한 방학을 경험했던 것인지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하필 개강 날 비가 사무치게 내려 바지와 신발이 홀딱 젖었지만 가뜩 상기된 학우들을 보니 새삼 대학은 다른 세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달까요, 심상을 하나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4학년, 졸업 시기를 고민하는 저이지만, 이들 무리에 섞인 탓이라 말해야 할까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럴 때, 저는 가장 취약합니다. 이에 대하여 방학 중 배운 교훈을 글로 녹여봅니다. 이 글은 저의 부끄러운 죄 고백입니다.</p>

<p>이번 방학은 제게 지난 1년의 의의를 찾게 해주는 시기였습니다. 일은 실로 하나님의 선물이더군요. 필요를 채워주고, 가치를 창출하고,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하고 감사와 인정, 그리고 보수를 받는 것은 제 마음속 빈자리를 채워주는 듯했습니다. ‘일’은 사람을 한데 모으는 힘이 있습니다. 각자가 인정이나 보수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을 수 있지만 결국 모두 일로 묶입니다. 일은 공동체를 만들고, 관계를 생성하고, 신뢰의 출처가 됩니다. 일은 숭고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주하기 두려웠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없이 낮아졌던 제 자신이 한순간에 콧대 높은 모습으로 변모하려 했다는 사실입니다.</p>

<blockquote>
  <p><strong>36</strong>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p>

  <p>— 로마서 11장</p>
</blockquote>

<blockquote>
  <p><strong>6</strong> 성읍 안에서 비상나팔이 울리는데,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어느 성읍에 재앙이 덮치면, 그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겠느냐?</p>

  <p>— 아모스 3장</p>
</blockquote>

<p>성경에서 말하듯, 천하만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천하 만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을 위해 있습니다. ‘일’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일’이 아닌, ‘증명’을 하려 했습니다.</p>

<figure><div class="image-strip"><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by-their-fruits-1.jpg" alt="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loading="lazy" /><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by-their-fruits-2.jpg" alt="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loading="lazy" /></div></figure>

<p>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기쁘던지요, 당시 찍어두었던 사진이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직접 편집해 표시까지 해두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어야 했습니다. 내가 받는 좋은 평가는 하나님께로 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목을 곧게 세우는 것에 열심과 평가를 소비했습니다. 일자리에서의 ‘증명’은 필연적으로 두 가지 평가를 요구합니다. 첫 번째는 주어진 업무를 수행해 내는 객관적 평가, 두 번째는 기여도를 드러내는 상대적 평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객관적 평가가 더욱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상대적 평가만이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p>

<p>일, 특히 나 세상에서의 일은 대부분의 믿는 이들에게 유일한 사역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땀과 성과가 겨자씨만 한 씨앗이 되어 누군가에게 심어질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년, 소망 하나로 살아온 저이지만 세상의 인정이 주는 달콤함에 너무 쉽게 무너졌습니다. 그 겨자씨만 한 씨앗이 소망과 함께 다른 이들에게 심어지기보다 나의 배를 채우기 위해 내 뱃속으로 들어가는 꼴이 되어버린 겁니다. 겨자씨 한 알이 얼마나 배를 채워줄 수 있을까요? 전혀 채워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의 능력으로는 내 배를 채울 만큼 겨자씨를 손에 쥐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눈이 멀어 추하게도 겨자씨를 탐하는 저를 보았습니다.</p>

<p>일은 선물입니다. 인정과 보수는 성경적입니다. (눅 10:7, 딤전 5:17 등) 그러나 그것을 받는 자에게는 그만한 씨를 뿌릴 의무가 있습니다. (마 6:1, 딤전 6:10 등) 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을 위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어요!” 대신, “하나님께서 이만큼이나 허락하셨어요!”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마태복음 20장에 등장하는 늦게 온 품꾼의 비유에서처럼, 하나님의 성과에 대한 기준이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다시,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p>

<p>나는 오늘, 어떤 열매를 심었을까요? 이제는 더 이상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자부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는다는 막연한 관념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가슴속 뜨거운 무언가뿐입니다. 이제 나의 눈은 나에게 모든 믿음은 맹목적이라 이야기합니다. 나의 귀는 나에게 모든 말이 허울 좋은 말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 눈먼 내가 심은 이 씨앗이 하나님의 것이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의 ‘순종’이 정말 순종이었길 의심과 확신, 후회와 보람 사이에서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p>

<p>죄인 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칭의를 신뢰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행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마음이 결코 순수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p>

<p>밧세바 사건 이후 지어진 다윗의 시가 유독 와닿는 밤입니다.</p>

<blockquote>
  <p>1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br />
2   내 죄악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br />
3   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br />
4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주님의 판결은 옳으시며 주님의 심판은 정당합니다.<br />
5   실로, 나는 죄 중에 태어났고,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br />
6   마음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는 주님, 제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br />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br />
8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십시오. 주님께서 꺾으신 뼈들도, 기뻐하며 춤출 것입니다.<br />
9   주님의 눈을 내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br />
10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br />
11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br />
12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br />
13   반역하는 죄인들에게 내가 주님의 길을 가르치게 하여 주십시오. 죄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br />
14   하나님,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내가 살인죄를 짓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내 혀가 주님의 의로우심을 소리 높여 외칠 것입니다.<br />
15   주님, 내 입술을 열어 주십시오.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내 입술로 전파하렵니다.<br />
16   주님은 제물을 반기지 않으시며, 내가 번제를 드리더라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br />
17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br />
18   주님의 은혜로 시온을 잘 돌보아주시고, 예루살렘 성벽을 견고히 세워 주십시오.<br />
19   그 때에 주님은 올바른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제물을 기쁨으로 받으실 것이니, 그 때에 사람들이 주님의 제단 위에 수송아지를 드릴 것입니다.</p>

  <p>— 시편 51편</p>
</blockquote>

<figure><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by-their-fruits-3.jpg" alt="렘브란트 〈다윗을 책망하는 나단〉" loading="lazy" /><figcaption>렘브란트 〈다윗을 책망하는 나단〉</figcaption></figure>]]></content><author><name>Hong-Iron</name></author><category term="pensees" /><category term="일" /><category term="죄 고백" /><summary type="html"><![CDATA[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일'이 아닌, '증명'을 하려 했습니다.]]></summary><media:thumbnail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uploads/by-their-fruits-1.jpg" /><media:content medium="image"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uploads/by-their-fruits-1.jpg"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entry><entry><title type="html">끝나서 하는 진짜 내 이야기</title><link href="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8/20/my-story-now-that-its-over/" rel="alternate" type="text/html" title="끝나서 하는 진짜 내 이야기" /><published>2026-08-20T03:30:00+09:00</published><updated>2026-08-20T03:30:00+09:00</updated><id>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8/20/my-story-now-that-its-over</id><content type="html" xml:base="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8/20/my-story-now-that-its-over/"><![CDATA[<p>지난 1년을 통틀어 오늘, 공식적으로 대표직이 끝난 오늘이 가장 기쁘다. 일말의 후회도 없고, 이는 끝까지 포기치 않고 불태웠기 때문이다.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으리라.</p>

<p>지난 일들을 복기해 보려 한다. 온전히 내 중심으로, 내 인간적인 마음으로 어떻게 바라보았고, 느꼈고, 무얼 얻었는지 적는 게 목적이긴 하나, 1년이라는 방대한 기간을 하나의 글로 압축하다 보면 비약은 생기겠지. 다만 고양감에 찬 지금,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보고자 한다.</p>

<p><strong>1. 나는 책임이 싫다</strong><br />
처음 대표 순장을 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나는 책임을 지는 것이 극도로 싫다. 개인적인 일은 아무리 무너지더라도 무시할 수 있는데, 타인이 연관되는 순간, 나는 팔다리가 잘리더라도 기어가야 하는 성격이다.</p>

<p>무엇이 나를 이토록 모순되게 만들었을까 여전히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나를 갈아 넣을 것을 너무나 잘 알았고, 실제로도 그랬다.</p>

<p>영적인 영역이라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하나님이 두렵고, 또 너무 두렵다. 그의 죄 사하심에 너무 큰 사랑과 동시에 짐을 느낀다.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그것과 반대의 행동을 할 때에 너무 강하게 의식된다. 내게 영적인 영역은 가장 실제적인 영역이다.</p>

<p><strong>2. 생각보다 약했다</strong><br />
선교 단체, 청년, 만 명의 여름수련회, 기드온, 기타 등등 오늘날처럼 차가운 세상 속에서 길거리에서 예수를 전하는 청년들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CCC가 정말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모임인 줄로 알았다.<br />
그런데 아뿔싸, 우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들의 집단이었다. 자신감 넘치게 자신의 무지를 뽐내는 사람들의 집단에 불과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의 감상은 그러했다.</p>

<p>얼마나 좌절했는지, 나 같은 신학 모르는 고졸에게도 충격이었는데,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우스울까 싶을 정도였다. 맞는 이야기는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되었고, 객관적인 분석은 우리가 기피하는 “효율적인 사역”으로 치부되고, 결국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판단이 선택되는 것으로 보였다.</p>

<p>물론 내가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선호하는 까닭도 있다. 타당해야 하고, 보편적이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영역이 성경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그 반박 또한 성경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겨 그렇게 묵상하고, 준비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씀을 모르는 청년들의 집단은 그 한계가 명확했다. 설령 다들 은연중 동일한 생각을 했어도 접근 방식이 그들의 사각지대에서 오면 누가 이해할까.</p>

<p><strong>3. 닿지 않았다</strong><br />
하지만 가장 어려웠던 건 역시 ‘동역자’  들 간의 관계였다. 아무래도 청년 선교 단체의 한계를 마주하니 묵상을 나누어야겠다 생각했다. 내 묵상이 곧 내 생각과 행동으로, 그리고 사역으로 이어지니 말이다. 그런데, 결국 닿지 않았던 모양이었다.</p>

<p>사람들은, 설령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말에 관심이 없다. 교훈을 찾을 마음도, 뜻을 함께할 생각도 없다. 설령 대표단이라 하더라도 그런 마음가짐이 기본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과 같은 말을 해주거나, 그들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큰 감동을 주는 말들을 기억하지, 그 외의 것들이 아무리 유익하다 한들 결국 닿지 않는다. 그 사실을 크게 깨달았다.</p>

<p>나의 소통의 미숙과 더불어, 다른 이들의 대응의 미숙함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불만을 말하지 않았고, 다만 자신의 관심이 식는 것을 숨기고 있었다. 결국 영적인 영역에 대해 관심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겠는가, 당장 눈앞에 있는 ‘이번 주에 할 일’ 정도뿐 더하겠는가. 그런 악순환의 고리가 지속되었다.</p>

<p>다들 몰랐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관심이 식으면 왕래가 줄고, 왕래가 줄으면 우선순위가 줄어들고, 타인에게 짐이 과중된다. 자신에게도 이것이 칼이 되어 돌아오는데, 그 이유를 무관심이 끝까지 알지 못하게 한다.</p>

<p><strong>4. 정신이 아팠다</strong><br />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를 만드셨고, 사랑을 이루시려 자신을 배신한 미천한 피조물의 몸을 입고, 그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대신 죽어주셨다. 하나님에게 사랑이란, 관계란 정말 정말 중요한 것이었고, 너무나 마음 아파하신 영역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그래서 우리는 단절에 매우 크기 상처 입는다.</p>

<p>온 같 종류의 단절을 모두 경험하고 있었다. 가족, 친구, 의지했던 순장님들 등등. 사역 중 내게는 ‘내 편’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없었던 시간이 있었던 시간보다 더 길다. 내 의도를 알아주는 사람, 물어봐 주는 사람. 찾아주는 사람, 먼저 말 걸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도리어 가벼이 여겨지거나 무시당하는 일이 더 많았다.</p>

<p>특히나 내게 이것이 매우 치명적이었는데, 나는 심리적으로 도움이 매우 크게 필요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울증, 양극성 장애, 공황 등 좋지 않은 것들을 연달아 가져버린 상황이었고 특히나 전두엽은 치매환자 수준의 기능이었다. 그래서 특히나 아무도 매달릴 사람 없는 게 큰 상처로 남았다. 이 영역에서 가장 크게 실망하지 않았을까. 늘 답답해하며 눈물과 기도로 지냈던 기억이 난다. 함께 하려는 모든 순간이 비참했다.</p>

<p>그리고 그런 내가 좋은 말과 행동으로 도움을 구할 수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수 일을 굶은 성장기 어린이에게 당장 도움이 될 음식들이 눈앞에 있는데 음식들이 도망을 친다면, 그 아이는 화를 내지 언젠가 올 음식을 기다리지 못한다. 완전히 지치고 무너졌을 때, 그것이 자의라 부르기 어려울 때에서야 기다리게 될 것이다. 정신병도 똑같다.</p>

<p>물론 이 일련의 일들로 나는 우리 공동체가 “내가 아파요” 리고 말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길 바라게 되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 공동체가 그럴 수 있었으면 했다. 예수님께 병자가 몰려들었듯, 그리고 그들이 치유를 받았듯 관계의 회복으로 치유가 일어나는 공동체상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우리 대표단 순장님들이 한번은 공통적으로 ‘한 영혼도 놓치지 않는 대표단’을 비전으로 품는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나는 자신 있게 내가 그들 중 누구보다도 그 비전을 크게 품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p>

<p><strong>5. 홀로 섰다</strong><br />
매우 강한 영적 압박, 책임감의 무게, 그리고 정신병과 지지기반의 부재,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서 받는 큰 상처는 나를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분명하게 내몰았다.</p>

<p>하루는 정말 죽을 작정을 했었다. 사랑방 뒤편에 작은 산이 있는데, 올라가다 보면 가파른 경사가 있는 곳이 있다. 거기서 강하게 앞으로 구르면 어딘가 걸리거나 강하게 부딪혀 죽지 않을까 했다.</p>

<p>3시간을 울면서 고민했는데, 결국 나를 품을 사람이 당장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살아나오게 했다. 흔히들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로 이인증을 뽑는다. 모든 것이 현실감 없고 자신이 타자처럼 느껴지는 병이다. 그때 내가 얼마나 불쌍하게 여겨지던지, 맛있는 거 먹이고 재우고 싶어졌었는데, 아마 그 상태가 도리어 당시에 도움이 되지 않았었을까.</p>

<p>이때의 자신에게 참 대견하게 느끼는데, 정말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도 잘 버텨낸 것이었다. 물리적으로도 혼자였고, 심리적으로도 혼자였는데 잘 버텨냈다. 공동체에서 도움을 찾지 못해 병원으로 찾아갈 줄 알았고, 사람들이 묻거나 들어주지 않으니 글로 쓸 줄 알았다. 그렇게 버텨낸 나 자신이 참 대단하다.</p>

<p><strong>6. 포기하지 않았다</strong><br />
그리고 나는 나의 매우 강한 의지를 보았는데, 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과학적으로 무언가 할 수 없는 상태였더라도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먼저 다가가 물어보고 해결하려 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매번 결과가 같아도, 나는 매번 다시 시도했다.</p>

<p>전두엽의 기능이 치매환자 수준이라 절제를 절대 못하는 상황에서도 참았고 기다렸다. 아무리 늦었다고 생각되어도, 안된다고 여겨져도 포기하지 않았다.<br />
내가 지나온 이 모든 길은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 하나님께서 하셨다고밖에 말하지 못한다. 나는 포기치 않음으로, 포기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하나님을 찾음으로 그의 은혜와 기적을 누렸다.</p>

<p>그뿐만 일까, 포기치 않으니 나의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한둘 생겨 나와 함께 울어주었다. 용민 순장님, 석진 순장님, 찬우 순장님, 주원 순장님, 인하 순장님과 윤정 순장님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이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함께해 주고, 나를 위해 울어준 것이 내게 그리스도를 증거했다.</p>

<p><strong>7. 소망</strong><br />
물론 나는 이제 염세적이고, 비난을 참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내 가슴에는 큰 소망이 불타오른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가는 예수 없는 집단이 아니라, “내가 아파요”라며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죄 고백이 스스럼없이 일어나는 진정한 회복 공동체를 나는 소망한다.</p>

<p>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은 하신다. 다만 보편적으로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회복을 허락하신다.</p>

<p><strong>8. 상처의 회복을 기다린다</strong><br />
나는 용서하려 노력하고 있고, 이제는 시야에 보이지 않는 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영역에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생긴 상처를 회복이 생각보다 더디다.</p>

<p>이것 또한 새로 알게 된 사실인데, 은혜는 은혜고 상처의 회복은 별개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요한 계시록에서도 심판과 구원이 있은 후에 눈물을 닦아주시지 않으시던가!</p>

<p>나는 여전히 우리 대표단을 생각하면 숨부터 막혀온다. 또 투명 인간이 되는 게 무섭다. 또 혼자가 되고 고민하는 게 무섭다. 남들보다 더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내게 상처 준 사람을 보면 많이 밉다.</p>

<p>그런데 나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이것은 용서를 넘어 축복의 증거이나, 나의 상태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를 반증한다. 언젠가 아물어 안아줄 수 있게 되고 싶다.</p>

<hr />

<p>결코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내가 느끼는 만큼 당신에게 닿을 수 없겠죠. 감각기관이 우리 서로 너무 다른걸요. 그러나 제가 경험한 하나님은 정말, 정말 크십니다. 그의 사랑은 너무나 강렬하고 아름다워서 정말 소망 삼고 살아갈 때, 내 눈에 눈물이 흘러도 “기쁨”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p>

<p>나는 지금 너무 기분이 좋아 잠이 오지 않습니다. 너무나 후련한 마음에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음이 증거 됩니다.<br />
하나님께서 나를 굳세게 하시고 강하게 하셨으니, 이제 내가 어디서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p>

<p>상하였으나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즉 무얼 두려워할까요?</p>

<p>아픔을 경험한즉 누굴 위하지 못할까요?</p>

<p>예수를 알게 된즉 어디서 살아내지 못할까요?</p>

<p>손에 못 자국을, 옆구리에 구멍을 두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를 통해 도마에게 부활을 증거하셨습니다. 나도 내 상처로 증거해보렵니다.</p>]]></content><author><name>Hong-Iron</name></author><category term="pensees" /><category term="사역" /><category term="상처" /><summary type="html"><![CDATA[지난 1년을 통틀어 오늘, 공식적으로 대표직이 끝난 오늘이 가장 기쁘다.]]></summary><media:thumbnail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og/site.png" /><media:content medium="image"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og/site.png"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entry><entry><title type="html">그리스도인은 관객 이상이어야 한다</title><link href="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8/15/more-than-spectators/" rel="alternate" type="text/html" title="그리스도인은 관객 이상이어야 한다" /><published>2026-08-15T02:43:00+09:00</published><updated>2026-08-15T02:43:00+09:00</updated><id>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8/15/more-than-spectators</id><content type="html" xml:base="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8/15/more-than-spectators/"><![CDATA[<p>‘관객’은 보고 듣는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관객은 관객이 청취하는 것이 글, 음악, 영화, 드라마 등 무엇이 되던 상관없이 작품에게서 영향을 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소비한다. 유희나 정서적 충족을 목적으로 작품을 소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br />
‘작가’는 관객이 그러한 목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소비할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영향을 주고자 작품을 제작한다. 즉 ‘작품’은 작가의 영향력 행사의 도구이며, 관객은 이 도구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다.</p>

<p>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일본 여행을 하고 있다. 여행 일정으로 그 유명한 고시엔에 방문하였다. 마침 우리가 방문하는 때에 고교 야구 대회가 있어 경기를 보게 되었는데, 경기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찍은 사진이 아래와 같다.</p>

<figure><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more-than-spectators-1.jpg" alt="당시 경기 사진, 정말 막바지였다." loading="lazy" /><figcaption>당시 경기 사진, 정말 막바지였다.</figcaption></figure>

<p>고등학생의 경기에 이만한 인원이 몰리는 것도, 경기의 승패가 이미 갈라져 유희로서는 더 이상 볼 이유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숨죽이며 경기를 눈으로 담고, 응원하고, 즐긴다. 이들이 공유하는 어떠한 ‘관념’(추억, 경험, 문화적 지식 등으로 빚어진)이 스포츠라는 매체로 ‘일체감’을 제공하고, 그 결과는 서로 깊이 공감하고 기뻐하는 정서적 채워짐과 유희로 나타난다. 이들은 그러한 결과를 알고 기꺼이 스포츠의 영향을 받아들인 ‘관객’이다.</p>

<p>부끄럽지만 처음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떠올렸던 생각은 “기껏 해봤자 고등학생들의 경기인데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정도였다. 하지만 곧 이들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어른들, 쉬지 않고 응원을 이끄는 학생들, 경기의 결과에 웃고 우는 학생들과 이들을 축하하거나 위로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아우러져 멋진 공동체성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 문득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이 사람들은 고교 야구 하나만으로 이렇게 하나 되는데, 왜 우리는 예수로도 안될까?”물론 오락과 신앙은 크게 달라 동일한 비교 대상으로 둘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야구와 예수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그리스도인을 비교하려 한다.</p>

<hr />

<p>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책을 바탕으로 ‘율법’이라는 토대를 만들어 변화하는 시대 속 유대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형태를 만들어냈다.<br />
과거 여호와와 그의 선지자들이 이 세상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을 사전에 정의하고 대응 방법과 그 이유를 나열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렇게 했다고 한들 아무도 이해하거나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br />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상상력과 믿음을 최대한 발휘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지침”을 만들어냈고, 이것을 율법이라 불렀다. 율법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으며, 악할 수 없다.(롬 7:12)</p>

<p>하지만 유대인들의 접근은 율법의 정체성을 크게 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아무리 거대한 상상력과 뚜렷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결정론적(원인과 결과가 모두 규명된) 접근을 할 경우, 필연적으로 사각지대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각지대는 오해, 의심, 그리고 악의적 남용을 야기한다. (마태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이혼에 관한 법이 그 예이다.)</p>

<p>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상황 중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하게 완성하셨는데(마태복음 5:17), 그의 방식은 더 많은 사례를 제시하고 꼼꼼한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비유와 성령의 임재를 통한 지혜를 허락하신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율법은 더 많은 규율이 아니라 능동적인 “성령의 인도” 라 표현하는 지혜가 적용되는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p>

<p>즉, 율법은 본래 하나님의 법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아 눈이 먼 우리에게 그 법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체화하는 것’으로 치환시키시는 은혜를 허락하셨다.</p>

<hr />

<p>이 이야기는 얼핏 들었을 때 우리의 사정에 참 좋은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앎으로 인한 책임이 처음부터 우리가 감당할 만한 게 아니라서 살아내야 하는 책임으로 형태만 바뀌었을 뿐, 책임은 여전하며 더 이상 무지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결코 사정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은혜이며, 감사해 마땅한 일이다. 다만 그 이유가 단순히 “더 쉬워서” 가 아니다.)</p>

<p>선택된 소수만이 예배의 사명을 허락받았던 제사장의 때와는 다르게, 참 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모두를 중보하시기 시작하신 십자가의 때부터 오늘날은 우리에게 그 권능과 사명이 위임되었고, 그로 인해 더 이상 제사로 하나님의 임재에 기꺼이 참여하여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는 일종의 거래 관계인 얄팍한 ‘관객의 예배’에서 벗어나 ‘믿음’과 ‘인격적 교통’이 공존하는 삶을 통해 삶에서 율법을 체화하는 신일 합의, 즉 ‘성화’의 영역에 우리는 도달하게 되었다.</p>

<p>과거 ‘관객’처럼 대가를 지불하고 기꺼이 영향을 받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고뇌하고 투쟁하고 변화하여 성화를 거듭하는 뼈아픈 ‘이 땅에서 율법대로 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된 것이다. 능동적인 거룩의 실천이 우리의 책임이 된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다.</p>

<hr />

<p>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br />
아무도 결정론적으로 대답해 줄 수 없다. 누군가의 성화의 삶의 결과가 행동을 정해주는 신적 조언일 수 있다. (나오미, 모르드게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성화의 삶으로 나온 부산물일 뿐, 우리가 살아야 할 궁극적인 마침표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함께하는 제자들도 알아듣지 못할 비유로 말씀하신 까닭 중 일부도 이것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정론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다만 없는 것과 일어나지 않은 일로 설명하셨다.</p>

<p>예를 들어 오늘날 미디어 중독으로 고민하는 이가 성경에서 해결책을 찾는다고 가정하자. 과연 그의 성경책에는 예수님께서 “유튜브를 그만 보아라”라고 말씀하신 구절을 찾을 수 있을까? 다만 누가복음 21장 34절 등의 말씀을 상상력을 발휘하여 당장 자신의 상태에 적용해 볼 따름이다.<br />
즉, 이처럼 능동적인 거룩의 삶을 말씀에 대한 지식, 허락된 상황, 그리고 적절한 상상력을 통해 거의 창작자의 영역에 다다른 채 살아내야 한다는 말이다.</p>

<p>그리고 그 창작물이 성화의 결과였는지의 진단은 마태복음 7장 16절에도 나와있듯, 열매로 알 수 있다. 그뿐일까, 누가복음 12장 51절에도 적혀있듯 우리는 ‘관객’들과 철저히 대립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유대 사회를 둘로 나누고 미움을 사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았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분쟁을 야기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p>

<p>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복음 앞에서 행동 강령을 기대하는 ‘관객’으로 있을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며, ‘마음의 할례’이며, ‘성령 충만’이다.</p>]]></content><author><name>Hong-Iron</name></author><category term="pensees" /><category term="성화" /><category term="율법" /><summary type="html"><![CDATA[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복음 앞에서 행동 강령을 기대하는 '관객'으로 있을 수 없다.]]></summary><media:thumbnail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uploads/more-than-spectators-1.jpg" /><media:content medium="image"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uploads/more-than-spectators-1.jpg"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entry><entry><title type="html">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title><link href="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8/01/no-time-to-th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title="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published>2026-08-01T00:09:00+09:00</published><updated>2026-08-01T00:09:00+09:00</updated><id>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8/01/no-time-to-think</id><content type="html" xml:base="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8/01/no-time-to-think/"><![CDATA[<p>이게 추가근무 할 때인가? 억울해서 추가 근무할 때를 찍었는데,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네요.</p>

<hr />

<figure><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2.jpg" alt="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loading="lazy" /></figure>

<p>내가 말이 많긴 한데….<br />
글이 길긴 한데…</p>

<hr />

<figure><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3.jpg" alt="양자 컴퓨터 멘토링을 끝까지 붙드는 그" loading="lazy" /><figcaption>양자 컴퓨터 멘토링을 끝까지 붙드는 그</figcaption></figure>

<p>석진 순장님은 기회 한번 한번을 되게 귀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요. 덕분에 기회에 대해 고찰을 많이 하게 됐고, 이번에 일하게 된 것도 그 덕일지도요.</p>

<hr />

<figure><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4.jpg" alt="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loading="lazy" /></figure>

<p>아직도 퇴근길은 익숙하지 않더라고요. 서초구라 그런지 지하철 밖까지 줄이 있더라고요. 볼 때마다 공황이 와요. 그래서 저녁을 회사 주변에서 해결하고, 사람이 빠질 때까지 기디렸다 집에 들어가요.<br />
오니기리와이우동? 무튼 그런 이름의 집이었는데, 협소한데 사람은 또 없어서 좋더라고요.</p>

<hr />

<figure><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5.jpg" alt="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loading="lazy" /></figure>

<p>폴 바셋이 타르트 맛집인거 알고 계셨나요?<br />
갑자기 2년 전 쯤에 먹었던 기억이 나서 사봤어요.<br />
그때만큼 맛있었는지는 모르겠네요<br />
문득 서울대 사랑방이 그러워지는 타르트였습니다.</p>

<hr />

<figure><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6.jpg" alt="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loading="lazy" /></figure>

<p><strong>아이 참.</strong></p>

<hr />

<figure><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7.jpg" alt="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loading="lazy" /></figure>

<p>파스칼의 팡세를 샀어요.<br />
팡세, 참 좋아하는 단어인데요,<br />
단어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이 책이 걸작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아지네요.</p>

<hr />

<figure><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8.jpg" alt="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loading="lazy" /></figure>

<p>펜타 치즈 와퍼에 패티 추가해서 드셔보세요<br />
진짜 하나님 일찍 만나는 맛</p>

<hr />

<figure><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9.jpg" alt="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loading="lazy" /></figure>

<p>1년은 사역하느라,<br />
최근에는 일한다고 친구들이랑 놀지 못했어요.<br />
잘 챙겨주지도 못하는데, 1년이 넘도록 게임 할때마다<br />
못한다고 할걸 알면서도 물어봐주고,<br />
몇번이고 약속을 미루고 취소해도 또 불러주는 친구들이에요.<br />
또 때마침 마인크래프트를 한창 하고 있어서<br />
같이 웃고 떠들던 고등학교 때가 떠오르더라고요.</p>

<p>이 친구들 덕분에 많은 고비를 넘겼었는데,<br />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따뜻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p>

<hr />

<figure><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10.jpg" alt="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loading="lazy" /></figure>

<p>인수인계 받는 주원 순장님</p>

<hr />

<figure><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11.png" alt="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loading="lazy" /></figure>

<p><strong>그리고 지금, 야식으로 국밥을 시켰습니다.</strong></p>

<hr />

<figure><div class="image-strip"><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12.jpg" alt="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loading="lazy" /><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13.jpg" alt="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loading="lazy" /></div></figure>

<figure><div class="image-strip"><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14.jpg" alt="믿지 않는 제 친구들이 생각나는 파트에요." loading="lazy" /><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15.jpg" alt="믿지 않는 제 친구들이 생각나는 파트에요." loading="lazy" /><img src="/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16.jpg" alt="믿지 않는 제 친구들이 생각나는 파트에요." loading="lazy" /></div><figcaption>믿지 않는 제 친구들이 생각나는 파트에요.</figcaption></figure>

<p>안셀름 그륀 이라는 카톨릭 신부의 책이에요.<br />
그 내용이 참 좋아서 첨부합니다.</p>

<p>이 신부의 주장에 의하면<br />
우리가 주장하는 사랑은 인간적인 것을 초월하지만,<br />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위로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에요.<br />
정말 참된 위로, 즉 신적인 위로는 인간적인 것 안에 있어요.<br />
위로는 낙관적인(피안과는 다른) 믿음이기 때문이에요.</p>

<p>저는 적어도 지난 6개월 이상은,<br />
너무 지쳐서 다른 사람들의 생일을 챙기길 그만두었어요.<br />
제가 위로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br />
위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p>

<p>그런데 위로가 신적인 것임과 동시에 내 안에 있다면,<br />
‘위로 받지 못하는 것’과 ‘위로 하지 못하는 것’은<br />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p>

<p>위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br />
타인의 고통에 더욱 공감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br />
그걸 느끼기 싫어서<br />
굳이 거듭 마음에도 없는 사과로 상대의 생각을 조작하거나,<br />
해결책을 제시해서 빨리 덮어버리려는 걸지도 몰라요.<br />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이 제대로된 위로 받아본적 없어서<br />
위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라 생각해요.</p>

<p>즉, 위로는 신앙과는 상관 없이<br />
(물론 신앙의 성숙의 척도가 될 수 있겠지만)<br />
받아본 자와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자 이외에는<br />
줄 수 없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br />
허락되지 않은 놀라운 은사가 아닐까 싶어요.<br />
그게 저의 친구들,<br />
그중에서도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있다는 사실이<br />
제게는 그 증거에요.</p>

<p>저는 요즘 일에 몰두하다보면 점심 시간인줄도 모르고<br />
집중하고 있는 시간이 길어요.<br />
그만큼 제가 공상을 하고, 생각을 할 시간이 줄어들어요.<br />
일상은 단조로워지고, 퇴근 후 걸으며 보내는 한두시간이<br />
하루 중 가장 모험적인 시간이에요.</p>

<p>공동체를 벗어나 단순하고 단조로운 삶을 살게 되니,<br />
비로소 피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내고 싶은<br />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새겨졌어요.<br />
기복은 있지만, 아직 상태가 좋지는 않아도<br />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도 위로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br />
책임과 결과를 통해 허락하신 보람을 맛보고,<br />
세상의 덧없음과 사회의 차가움을 통해 소망을 기대합니다.</p>

<p>내가 받을 위로는 멀리 있지 않았고,<br />
이제는 조금, 위로를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p>

<p>나의 생각의 안개를 거두고 보니,<br />
세상에는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 참 많아요.<br />
안아줄 줄 알면서도, 그 힘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도 참 많아요.<br />
그리고 무엇보다, 안겨야 하는데 자신도 그 필요를 모르는<br />
사람이 너무 많아요.</p>

<p>복음은 들이미는게 아니라<br />
나의 품에서, 등에서 빛나게 해야 하는 것일지도 몰라요.<br />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헬라 문화권에서<br />
무신론자로 여겨졌던 이유를 알겠어요.</p>]]></content><author><name>Hong-Iron</name></author><category term="pensees" /><category term="위로" /><category term="일상" /><summary type="html"><![CDATA[내가 받을 위로는 멀리 있지 않았고, 이제는 조금, 위로를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summary><media:thumbnail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1.jpg" /><media:content medium="image"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uploads/no-time-to-think-1.jpg"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entry><entry><title type="html">하나님께서 너를 위해 마련하신 특등석</title><link href="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7/17/front-row-seat/" rel="alternate" type="text/html" title="하나님께서 너를 위해 마련하신 특등석" /><published>2026-07-17T19:47:00+09:00</published><updated>2026-07-17T19:47:00+09:00</updated><id>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7/17/front-row-seat</id><content type="html" xml:base="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7/17/front-row-seat/"><![CDATA[<p>가령 당신이 가장 의지하던 ‘영적 권위’를 소유한 사람에게 부정당했다 생각해 봅시다. 당연하게도 시험이 들 겁니다. 그런데, 왜 시험이 들까요? 왜 괴로울까요? 차기 대표단을 생각하며 공상하던 중에 문득 질문이 생겨 이에 대한 고찰을 해보았습니다.</p>

<p>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각자의 ‘태도’ 때문일 겁니다.<br />
영적으로 권위 있는 자에게 의지할 정도라면 분명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사역이나 일을 여럿 감당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사역과 일은 우리가 높아지거나 성과를 내는 자리가 아니라 다만 더욱 낮게 엎드려서 낮아지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낮아짐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궂은일을 도맡아 하기도 할 것이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봉사하는 이가 있을 수 있고, 시간과 자원을 쓰며 사람을 살피는 사람 등이 있을 테죠.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섬긴다’라고 말할 법한 대부분의 일들은 심리학적으로 우리를 불리한 위치에 두게 만듭니다.</p>

<p>크게 세 가지의 카테고리가 있다고 합니다. <strong>반발 심리, 자아 위협, 역화 효과</strong>입니다.</p>

<p>사람은 자신의 자유나 통제권이 침해당한다고 생각되면 무의식적으로 반발합니다. 당신이 은혜에 겨워 ‘나눔’이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생각과 감정,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설명의 정도에 따라서 이것이 ‘나눔’이나 ‘정보 전달’이 아니라 ‘나를 통제하기 위한 강한 압박’으로 인지됩니다. 아무리 감동적이고 타당한 이야기라도 ‘자율성’을 위해 사람은 방어적 태도를 먼저 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strong>반발 심리</strong>입니다.</p>

<p>뿐만 아니라, 설명이 길고 상세해질수록 상대는 두 가지 불편함을 느끼고 <strong>자아 위협</strong>을 감지합니다. 먼저는 “내가 이걸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이렇게까지 설명하나?”라는 인식을 주어 상대방의 판단력이나 이해력을 무시하는 것으로 오독됩니다. 아는 걸 거듭해서 듣는 건 지치기도 하고요.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에서 설명하는 사람은 곧 우위를 선점한 사람이라고 인지됩니다. 즉, 스승과 제자의 관계성이 우리의 무의식중에 적용되어 불균형이 생기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어 마음의 벽을 만듭니다.</p>

<p>여기서부터는 <strong>역화 효과</strong>, 악순환의 시작입니다. 오해는 이미 생겼습니다. 나의 의도가 아무리 선하더라도 뜻과 의도가 곡해되고, 이것은 소통의 횟수가 많고 수평적인 역할을 지향하는 관계일수록 곡해의 정도는 더욱 날카로워지겠죠. 말하는 사람은 결국 오해를 풀기 위해 더 많은 증거와 명확한 논리를 들이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상대방은 자신의 원래 입장을 더욱 고수하게 됩니다. 나의 ‘선한 의도와 말’이 상대방에게는 ‘자신의 논리를 방어할 연습 문제’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즉 수고는 압박으로, 설명은 통제로 곡해되어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p>

<p><em>지식의 출처</em><br />
[Brehm, J. W. (1966). <em>A theory of psychological reactance</em>. Academic Press]<br />
[Nyhan, B., &amp; Reifler, J. (2010). When corrections fail: The dynamics of partisan factual beliefs. <em>Political Behavior</em>, 32(2), 303-330.]</p>

<p>정말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죄성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이만큼이나 유치한 사람들일 겁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우리는 나와 당신이 아무리 유치하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려 애쓰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이미 믿음이 생겨버렸는걸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공동체의 자리에서 필연적으로 받을 상처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치유해나가야 할지 묵상했습니다.</p>

<p>그리고 묵상의 결과인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p>

<p><strong>1. 예수님은 늘 먼저 들으셨습니다.</strong></p>

<p>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항상 모든 일에 앞서 기도하셨습니다. 즉, 아버지의 뜻을 먼저 묻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문을 듣고 진리로 답하셨습니다.</p>

<blockquote>
  <p><strong>1</strong>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였다.<br />
<strong>2</strong>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랍비여,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br />
<strong>3</strong>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p>

  <p>— 요한복음 3장</p>
</blockquote>

<p>예수님께서는 온전히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셨고, 그렇게 드러난 그의 놀라운 영적 권위는 곧 니고데모가 그를 ‘랍비’라 부를 정도로 관계성의 불균형이 아닌, 온전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먼저 설명하지 않으시고 질문하게 만드시고, 진리로 답하셨습니다.</p>

<p><strong>2. 예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믿음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strong></p>

<blockquote>
  <p><strong>15</strong>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p>

  <p>— 마태복음 16장</p>
</blockquote>

<p>예수님의 일하심에서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믿으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믿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적이나 놀라운 설교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만, 믿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끔 설명하기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했던 믿음의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p>

<p><strong>3.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strong></p>

<blockquote>
  <p><strong>10</strong>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br />
<strong>11</strong>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br />
<strong>12</strong>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차고 남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br />
<strong>13</strong>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p>

  <p>— 마태복음 13장</p>
</blockquote>

<p>예수님도 분명 우리가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하길 누구보다 바라셨을 겁니다. 참하나님이시지만, 참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 고립감, 서운함, 서러움 등을 모두 느끼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이를 증언하지만, 예수님께서 말로 표현하신 때가 있습니다.</p>

<blockquote>
  <p><strong>38</strong>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p>

  <p>— 마태복음 26장</p>
</blockquote>

<p>찢어지는 마음으로도 우리에게 우리가 알아들을 만큼 설명 대신 빈 공간을 허용하셨습니다. 이해시키기보다 살아갈 방향성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해가 쌓일 것과 온전히 이해받지 못할 것을 인정하고 상대의 세상에 나의 세상의 것을 내 손이 아닌 상대의 손으로 두는 것은 답답하고 아픈 일입니다.</p>

<p>좋습니다, 우리가 설명하는 입장이 된다면, 내가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권위에 충실하게 살고, 그뿐 아니라 먼저 듣고 의도를 담아 대답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대가 스스로 도달하게 하고, 이 과정 가운데 느낄 쓸쓸함이나 외로움을 견디는 것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p>

<p>그런데, 우리는 말하기만 하지 않기 때문에 듣는 입장이 된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총 두 가지 정도로 귀결될 것 같습니다. <strong>상대의 영적 권위를 존중하기, 핵심 의도를 알아보기</strong>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실 때, 결코 아무나 세우시지 않으시며, 그냥 세우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을 신뢰하며 그를 신뢰하는 만큼이나 세워진 권위에 대하여 존중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수직적인 순종이 아닌 상호 간의 순종과 배려, 그리고 고찰과 소통이 필요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메시지와 메신저의 태도를 분리해서 듣는 훈련을 통해 상대의 핵심 의도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 부분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타고나기를 의도와 태도가 분리되지만 누군가는 노력해도 그렇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말이 길어진다는 것은 ‘대부분’ 반박하거나 면박을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상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자신의 에너지를 써가며 내게 전달해 준다는 것이거나 불안해한다는 뜻입니다.</p>

<p>결국 듣고 말하는 모든 영역에서 인내를 요구합니다. 목적 지향적 사고가 아니라 관계 지향적인 사고로 전환해야 하고, 치열하게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논할 만큼 우리는 고차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시대적, 문화적 배경으로 생긴 보편적 가치관과 각기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만의 세계의 법만 안 채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p>

<p>이 사실만으로 참 막막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실 때에는 더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사용된다는 놀라운 선물이며 하나님 임재 가장 앞줄에 놓인 ‘특등석’이지만, 세워졌고 세워질 사람은 그 순간부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모세는 아무리 잘하더라도 백성들에게 질타를 받았고, 예레미야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남유다의 영적 상태에 눈을 흘렸으며, 바울은 끝에 혼자 남았고, 그리스도는 구원 대상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각자가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을 보고 느끼고 애통하게 되고, 사람들 사이보다 하나님과 독대할 때가 편해집니다. 모든 것이 얕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풍성함을 항상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들의 오해가 기본인 죄성은 더욱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며 각기 다른 곳에 세워진 우리는 서로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각자의 고군분투 속에서도 서로를 위해 마음의 빈 방을 만들고, 애정 어린 수고와 진심이 오고 가는 이상적인 상황을 상상해봅니다. 내가, 우리 공동체가 이걸 참 잘하게 되었으면 하네요. 그럴 때, 세우심이라는 특등석이 정말 특등석처럼 느껴질 테니까요.</p>

<blockquote>
  <p><strong>17</strong>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p>

  <p>— 히브리서 13장</p>
</blockquote>]]></content><author><name>Hong-Iron</name></author><category term="pensees" /><category term="리더십" /><category term="소통" /><summary type="html"><![CDATA[세워졌고 세워질 사람은 그 순간부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사용된다는 놀라운 선물, 하나님 임재 가장 앞줄에 놓인 '특등석'입니다.]]></summary><media:thumbnail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og/site.png" /><media:content medium="image"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og/site.png"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entry><entry><title type="html">Adam’s Lamnent</title><link href="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7/13/adams-lament/" rel="alternate" type="text/html" title="Adam’s Lamnent" /><published>2026-07-13T03:01:00+09:00</published><updated>2026-07-13T03:01:00+09:00</updated><id>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7/13/adams-lament</id><content type="html" xml:base="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pensees/2026/07/13/adams-lament/"><![CDATA[<p>아담, 만인의 조상, 천국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의 달콤함을 알았기에 자신의 죄로 동산에서 쫓겨나고, 그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커다란 신음으로 탄식했습니다.<br />
온 광야가 그의 탄식으로 울려퍼졌습니다.</p>

<p>그의 영혼은 “내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슬프게 하였구나”라는 생각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동산의 아름다움을 잃은 것으로 슬퍼하기보다, 모든 영혼을 당신께로 이끄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것에 더욱 슬퍼하였습니다.</p>

<p>아담은 몹시 야위고, 몹시 울었으며, 이 땅은 무엇으로도 그를 기쁘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절절함으로 병들었고, 그는 이렇게 울었습니다.</p>

<blockquote>
  <p>“내 영혼이 아버지를 갈구하오니, 눈물로 그를 찾습니다. 어찌 그를 찾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와 함께 있을 때, 내 영혼은 감격하며 쉼을 얻었었고, 대적은 나를 가까이하지도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악한 영이 나를 뛰어넘었으며, 나의 영혼을 조롱하고 억누르니, 내가 죽기까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내 영이 아버지께로 발버둥 칩니다. 이 땅은 무엇으로도 나를 감격해 하지 못합니다. 내 영혼은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하며, 아버지를 다시 한번 뵙기를, 내 굶주림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일순간도 아버지를 잊은 적이 없으며, 내 영혼이 그분을 향해 파리해지며, 숱한 고난 속에서 크게 울부짖었습니다. 오,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타락한 피조물에게 자비를 베푸소서.”</p>
</blockquote>

<h2 id="2부">2부</h2>

<p>아담은 이렇게 탄식하였고, 그의 눈물은 얼굴과 수염과 바닥과 발을 적셨고, 온 광야가 그의 신음을 들었습니다. 짐승과 새들도 숨죽였습니다. 온 인류에게 아담의 죄로 평화와 사랑이 사라져 그가 울 때 말입니다.</p>

<p>동산에서 추방될 때에 이미 큰 슬픔을 알게 되었지만, 그의 아들 아벨이 형제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그의 슬픔은 더욱 무거워졌고, 영혼은 짓눌렸으며, 그의 울며 탄식했습니다.</p>

<blockquote>
  <p>“오, 내게서 날 백성과 민족들이여, 번성하여 땅을 메우되, 평화와 사랑 가운데 거하여라. 형제가 형제의 피를 보게 하지 마라. 내 영혼이 피 흘림으로 인해 부서지는구나. 오 아버지, 세상에 평화를 주소서. 오 아버지, 내 자녀들에게 평화를 주셔서, 서로 사랑하고 창조주 당신을 영화롭게 하소서.”</p>
</blockquote>

<p>아담은 동산을 잃고, 눈물로 그것을 찾았습니다. “오 동산, 나의 동산, 나의 아름다운 동산이여.” 그는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의 사랑으로 아담에게 또 다른 동산을 주셨습니다. 더 나은 낙원, 곧 삼위의 하나님의 빛이 눈부시게 빛나는 낙원을 주셨습니다.</p>

<h2 id="3부">3부</h2>

<p>이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은총이 부족하고, 위로자이시며, 영의 기쁨이신 성령이 부족합니다.<br />
오 아담, 우리의 조상이여, 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아버지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당신의 영혼은 이 땅에서 아버지를 알았고, 동산과 그 달콤함과 감격을 알았고, 이제 하늘에 머물며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주시고, 영혼이 그를 향한 사랑으로 어떻게 불타오르는지와, 그에게 이끌리는지 알려주소서. 오 아담, 아버지의 노래를 부르고, 우리의 영혼으로 듣고 기쁘게 하소서.</p>

<p>하지만 아담이 답하길 “내 자녀들아, 나를 평안히 두어라. 나의 영혼이 아버지를 향한 사랑으로 삼켜졌으니, 그에 대하여 말할 수 없구나. 나의 영혼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상처 입었고, 그의 임재로 기뻐하며 내 영혼은 평안하다. 너희도 아버지를 찾아라. 회개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위로하실 성령을 허락하신다.”</p>

<p>— <em>Adam’s Lament</em>, Saint Silouan</p>

<hr />

<p>러시아 문학은 그것만의 매력이 있다.<br />
신학적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면, ─내가 그들의 기조에 동의하는지를 떠나서─ 우리의 죄성에 대한 가슴 절절한 고백문이 참으로 다채롭게 존재한다. 비록 러시아어를 알지 못해 영문으로 번역된 시를 다시금 한국어로 옮겨 적지만, 그럼에도 이 행위로 하나님께 더 표현할 수 있는 내가 되어간다.</p>

<p>“나의 영혼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상처 입었고, 그의 임재로 기뻐하며 내 영혼은 평안하다. 너희도 아버지를 찾아라.”<br />
이 시, 혹은 애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br />
기쁨이 깃든 슬픔, 혹은 애통함이자,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 얻은 것에 대한 기쁨이며, 나의 영성이다.</p>

<p>아무리 어두운 시간을 지난다 하더라도,<br />
아무리 무너진다 하더라도, 나의 고통과 슬픔 속에는 이 길을 먼저 가신 그리스도가 계시니 나는 슬픔 중에도 기뻐하며, 고통 중에도 감격할 수 있다. 내가 느려지더라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동기였고, 멈추지 않을 이유이다.</p>

<p><em>Simul Iustus et Peccator</em></p>

<p>우리는 실로 죄인이며,<br />
은혜는 실로 은혜이며,<br />
실로 예수는 부활하셨다.</p>

<blockquote>
  <p><strong>17</strong>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br />
<strong>18</strong>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에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br />
<strong>19</strong>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br />
<strong>20</strong>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br />
<strong>21</strong>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br />
<strong>22</strong>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br />
<strong>23</strong>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br />
<strong>24</strong>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br />
<strong>25</strong>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br />
<strong>26</strong>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br />
<strong>27</strong>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br />
<strong>28</strong>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br />
<strong>29</strong>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br />
<strong>30</strong>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br />
<strong>31</strong>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br />
<strong>32</strong>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br />
<strong>33</strong>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br />
<strong>34</strong>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br />
<strong>35</strong>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br />
<strong>36</strong>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br />
<strong>37</strong>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br />
<strong>38</strong>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br />
<strong>39</strong>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br />
<strong>40</strong>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p>

  <p>— 예레미야애가 3장</p>
</blockquote>]]></content><author><name>Hong-Iron</name></author><category term="pensees" /><category term="번역" /><category term="애가" /><summary type="html"><![CDATA[성 실루안의 애가, 아담의 탄식을 영문 번역에서 다시 한국어로 옮겨 적으며 든 묵상.]]></summary><media:thumbnail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uploads/adams-lament-icon.png" /><media:content medium="image" url="https://hong-iron.github.io/Hongs_Blog/assets/img/uploads/adams-lament-icon.png"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entry></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