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그러나 요셉이 한 말을 아들들에게서 모두 전해 듣고, 또한 요셉이 자기를 데려오라고 보낸 그 수레들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 야곱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
28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니! 암, 가고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 하고 이스라엘은 중얼거렸다.
(창세기 45장)
야곱과 이스라엘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는 자”다. 거짓말하는 자, 스스로의 꾀와 힘으로 살아가려는 자, 곧 한 사람의 ‘나’를 가리킨다. (우리 개개인)
반면 그의 새 이름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겼다’는 말은 정말 하나님을 상대로 이겨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압도(창 32:25, 원어적 표현) 하지 않으심으로, 곧 져 주심으로 긍휼을 입었다는 의미가 훨씬 크다.
성경은 이 두 이름을 자주 섞어 쓴다. 창세기 49장에서는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이기도 한다.
2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는 모여서 들어라. 너희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 창세기 49장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부르실 것이라 약속하셨는데도(창 32:28), 성경은 왜 끝까지 한 사람을 두 이름으로 부를까?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개개인(야곱)을 당신의 백성, 사랑의 대상, 그리고 무엇보다 기꺼이 져 주고 싶은 이(이스라엘)로 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 눈에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이스라엘을 굳이 야곱이라 거듭 부르며 우리의 약함을 비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영생을 약속받았지만, 삶이 끝나는 날까지 죄성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죄인이고, 성경은 이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롬 7:22~23, 마 26:41, 요일 1:8).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언제나 이스라엘이다. 그분은 우리의 체질을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도(시 103:13~14) 그리스도 예수를 구태여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져 주셨고’, 우리의 죄성을 파멸이 아니라 은혜를 빛내는 통로로 삼으셨다(롬 5:20).
이스라엘과 언약
창세기 45장. 요셉을 잃고 베냐민마저 잃었다고 생각한 노인 “야곱”은,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러다 요셉이 한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정신을 되찾는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성경은 그를 “이스라엘”이라 부른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언약과 뗄 수 없다. 벧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다 이루기까지 그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다(창 28:15). 요셉을 잃은 약 22년 동안 그 약속은 끊어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이 전하는 하나님으로 가득 찬 이야기와, 눈앞의 수레를 통해 하나님이 한 번도 그를 떠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이어지는 46장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다며 약속을 확인해 주신다(46:3~4).
이스라엘이라 불릴 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의 믿음이 충만해야만 “이스라엘”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6 이스라엘이 자식들을 탓하였다. “어찌하려고 너희는, 아우가 있다는 말을 그 사람에게 해서, 나를 이렇게도 괴롭히느냐?”
…
14 너희들이 그 사람 앞에 설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게 해주시기를 빌 뿐이다. 그가 거기에 남아 있는 아이와 베냐민도 너희와 함께 돌려 보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는 것이지, 난들 어떻게 하겠느냐?”— 창세기 43장
기근은 점점 심해지고, 애굽의 총리(요셉)는 막내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는다면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했다. 막내마저 내줘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아들들에게 원망을 쏟아낸다(43:6). 그런데 성경은 이 원망하는 노인을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부른다. 우리의 눈에는 너무나 연약한 “야곱”의 모습인데, 왜 “이스라엘”로 불렸을까?
14절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야곱이 끝에는 하나님께 다시 매달렸기 때문이다(43:14).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야곱은 다시 한번 벧엘에서 하나님이 스스로를 소개하신 이름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을 언급하며 매달렸다.
“이스라엘”은 점잖은 기도가 아닌 고관절의 뼈가 어긋나는 씨름으로 얻어낸 이름이기도 하다. 야곱이 믿음이 충만해서 “이스라엘”이라 불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흔들리고 무너지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그 이름을 한 번도 거두지 않으셨기에, 그는 다시 매달릴 수 있었고 여전히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로 불리는 감격
이 묵상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다. 그저 좋은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창세기 45장의 말씀을 마침내 붙들었을 때,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한 놀라운 묵상이었다. 그래서 이를 기록해 두려 한다.
요즘 마음속에 괴리가 있다. 외롭고 괴로운데, 막상 누군가에게 이 마음을 꺼내 놓으려 하면 또 상처받을까 망설여진다. 마음을 내보였다가 가볍게 여겨지고 아프지 않은 척 돌아서야 했던 기억들이 아직 깊숙히 남아 있는 모양이다. 다시 손을 내밀었는데 여전히 아무도 잡아 주지 않으면 어쩌나, 그게 겁이 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공동체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다. 순방에도 뜸해졌고, 마음이 지쳐 채플과 리트릿도 한 번 쉬어 갔다.
2층 침대에 새카만 커튼을 달았고, 그 안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할까 봐 속마음은 잘 꺼내지 않게 되었다. 담담한 말투와 늘 같은 표정이 나를 지켜 줄 거라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아직 누군가에게 마음 편히 기대어 울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무한히 솔직해질 수 있는 구석, 기댈 구석이 말씀밖에 없다. 이처럼 나의 심령이 가난한 탓일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야곱과 같은 나를 이스라엘로 봐 주신다는 사실에 눈물이 흘렀다. 내게 구원의 언약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셨다.
야곱에게 수레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고후 1:20).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름을 끝내 거두지 않으시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내 삶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나타나실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의 “요셉”이 언제 어디서 누구로 나타날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나를 “이스라엘”로 보시는 하나님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끝까지 찾는 목자의 사랑으로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확신이 조금씩 빛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하시는 일이 분명 있지만, 요즘은 나와 단둘이 계신다. 내가 아무리 두려워 떨고 있어도 나를 “이스라엘”이라 불러주신다. 내가 아무리 회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버리지 않으신다.
할렐루야. 새카만 커튼으로 둘러싼 나의 요새 안에, 하나님은 오늘 나와 함께 누워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