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요, 또 한 아내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3 엘가나는 매년 한 번씩 자기가 사는 성읍에서 실로로 올라가서, 만군의 주님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다. 그 곳에는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주님의 제사장으로 있었다.
4 엘가나는 제사를 드리고 나서는, 늘 아내 브닌나와 그가 낳은 모든 아들딸에게 제물을 각각 한 몫씩 나누어 주곤 하였다.
5 그러나 한나에게는 두 몫을 주었다. 비록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지만,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하였다.
6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다.
7 이런 일이 매년 거듭되었다. 한나가 주님의 집으로 올라갈 때마다, 브닌나가 한나의 마음을 늘 그렇게 괴롭혔으므로,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8 그럴 때마다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위로하였다. “여보,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 않으려 하오? 왜 늘 그렇게 슬퍼만 하는 거요?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

— 사무엘상 1장 (새번역)

사람을 대하는 것,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다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이 본문을 읽기 전까지는 이 두 가지 영역이 서로 다른 영역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인간관계 또한 마치 수학이나 코딩 문제처럼 ‘충분히 관찰하고 노력을 들이면 풀 수 있는 문제’ 정도로 보았습니다. 제게 ‘문제’라는 단어는 대부분 목적이었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였고, 더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일절 담겨있지 않았고, 다만 무언가를 실행했을 때 일어나는 일들의 가능성을 보고자 했던 강한 의지였습니다. 엘가나 또한 저와 비슷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한나의 입장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따라가 볼 때, 엘가나와 저의 생각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한나는 불임으로 인한 수치심, 정체성의 몰락, 가정 내 폭력(브닌나로부터) 등을 당하며 어디에도 안전지대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아마

1. 그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 (타자의 존재론적 확증)
2. 폭력의 원인을 냉정하게 차단하는 것 (보호)
3. 그녀에게 위안을 주려 하기보다 위안을 함께 찾고 기다리는 것 (하나님으로의 시선 재배치)

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엘가나는 전혀 다른 방법을 택합니다.

성경에 적혀있는 것을 볼 때, 엘가나는 별다른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습니다. 엘가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보,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 않으려 하오? 왜 늘 그렇게 슬퍼만 하는 거요?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 우리는 이 짧은 내용만으로도 많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1. 결핍을 채우는 수단으로 자신을 제시함 (나르시시즘) : 한나에게 필요했던 건 ‘아들’ 이었습니다.
2. 눈물을 닦아주기보다 다그침 (자아상의 방어) : 엘가나는 한나에게 “왜” 라며 세 번이나 다그칩니다. 이 다그침은 안타까움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고대 문화를 고려했을 때 언뜻 엘가나 자신의 무력함으로 비칠 수 있는 한나의 슬픔이 당장 멈추길 기대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3. 슬픔의 자리와 시간을 빼앗음 (거울상적 자아도취) : 엘가나는 한나에게 끝에 아들 열 명보다 내가 낫지 않느냐 라고 묻습니다. 한나는 그 자리에서 “아닙니다. 아들 열 명이 더 낫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엘가나가 기대했던 대답은 당연하게도, “네, 아들 열 명보다 당신이 더 낫습니다.” 였을 겁니다. 자아상의 방어에 연계로 한나를 통한 거울상적 자아를 확증 받고픈 그의 나르시시즘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럴 때, 위로받아야 할 대상이 한나에게서 엘가나로 뒤집히며 한나는 더 깊은 고립감에 빠지게 됩니다.


최근 “라캉”이라는 정신 분석 학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 저의 구조적인 사고방식이 이해하기 좋게 만들어져 있어, 그의 사고와 표현을 빌려 묵상을 실행까지 이어가 보고자 합니다. 라캉의 세계에는 ‘상상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상상계는 ‘이상적인 나’와 타자를 비추는 ‘거울’의 세계입니다.

가령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약 12~18개월)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이 아이는 스스로 밥을 먹지도, 의미를 가진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마음껏 뛰거나 춤추지도 못할 겁니다. 이 아이에게 ‘감각’ 이란 파편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거울을 들여다볼 때, 거울에 비친 아이의 모습은 온전합니다. 있어야 할 곳에 몸의 각 기관들이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때 아이는 “아, 이 완전한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라며 착각합니다. 라캉의 세계에서 자아는 이러한 ‘착각’입니다.

이러한 ‘착각’의 렌즈가 관계에 적용될 때, 몇 가지 오류를 야기합니다.
1. 타자를 독립된 인격이 아닌 거울로 대함 : 타인을 내 능력, 가치, 도덕성 등을 확인받기 위한 거울로 소비함. 즉, 나의 행동이 상대에게 야기하는 결과를 통해 보는 자신의 이미지를 갈망하는 것.
2. 거울상적 경쟁(1:1 대립) : 상상계 속에서는 질서보다 상대적 기준만 존재함. 즉, 누가 더 위에 있는지, 누가 더 정답인지를 두고 끊임없이 비교하게 됨.
3. 결핍을 오류로 보는 완벽주의 : 엘가나가 “내가 낫지 않냐”, “왜 우냐”라며 성급하게 굴었던 것처럼 자신이나 상대방에게서 발견되는 실패를 견디지 못하고 통제하려 듦.


저는 아무도 이런 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정도의 차이는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저를 예시로 들었을 때, 제 상상계는 제게 있어서 매우 실제적입니다. 한 마디로, 고집이 매우 세고 거울 세계 속 착각에 빠져 산다는 뜻이죠.

제 신경학적 특성 또한 한몫합니다. ADHD의 두뇌는 문제 해결이 곧 가장 빠른 도파민 결핍의 해결책이라 여기고, 전두엽의 억제력이 낮고, 미해결된 무언가가 있을 때 이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이를 견디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에 극도로 예민하기 때문에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감지하는 순간 방어기제가 의지와 상관없이 발동되어 버립니다.

참 피곤하게 태어났습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장애였다면 스스로도 한계를 매 순간 통감해 행동을 적절히 하고, 상대방들도 각자의 기대치를 조정할 텐데 말입니다. 뇌, 정신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해당하는 차이이다 보니 스스로도 모른 채로 오랜 시간을 지냈고 다른 이들도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또다시 낙심할 때쯤, 하나님께서 한나의 이야기를 통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10 한나는 괴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였다.
11 한나는 서원하며 아뢰었다.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저를 기억하셔서, 주님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12 한나가 주님 앞에서 계속 기도를 드리고 있는 동안에, 엘리는 한나의 입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13 한나가 마음 속으로만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로 생각하고,
14 그를 꾸짖었다. “언제까지 술에 취해 있을 것이오? 포도주를 끊으시오.”
15 한나가 대답하였다. “제사장님, 저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저의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았을 뿐입니다.
16 이 종을 나쁜 여자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나도 원통하고 괴로워서, 이처럼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17 그러자 엘리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오.”
18 한나가 대답하였다. “제사장님, 이 종을 좋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한나는 그 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

— 사무엘상 1장

17절 엘리의 대답은 원어상 미완료형 문장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이 미완료형 문장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한나는 곧바로 괜찮아졌습니다. 그녀에게 막연한 “해주시리라”라는 믿음이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15절, 한나는 자신을 주님 앞에서 쏟아놓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쏟아 놓았다’라는 표현은 원어로 ‘샤파크’ 즉, 부어버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그녀는 온전히 있는 그대로, 하나님을 설득하려 하기보다 다만 드리려 했습니다.
11절에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서원합니다. 이 서원이 의미 있는 이유는, 한나가 아직 아이를 갖기 전에 이미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결핍으로부터 시작했을지 몰라도 결핍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문제라 여기던 것들, 그것들을 만드는 환경이나 형질은 남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해결되기 전에, 한나가 그러했듯, 손을 펴는 것을 연습해보려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상처입혔던 사람이, 나를 상처입혔던 사람이, 상처 입혔던 내가 문제가 아니었다 라는 사실을 조금은 알게 될까 싶습니다.

10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내가 뭇 나라로부터 높임을 받는다. 내가 이 땅에서 높임을 받는다.

— 시편 46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