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을 통틀어 오늘, 공식적으로 대표직이 끝난 오늘이 가장 기쁘다. 일말의 후회도 없고, 이는 끝까지 포기치 않고 불태웠기 때문이다.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으리라.

지난 일들을 복기해 보려 한다. 온전히 내 중심으로, 내 인간적인 마음으로 어떻게 바라보았고, 느꼈고, 무얼 얻었는지 적는 게 목적이긴 하나, 1년이라는 방대한 기간을 하나의 글로 압축하다 보면 비약은 생기겠지. 다만 고양감에 찬 지금,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1. 나는 책임이 싫다
처음 대표 순장을 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나는 책임을 지는 것이 극도로 싫다. 개인적인 일은 아무리 무너지더라도 무시할 수 있는데, 타인이 연관되는 순간, 나는 팔다리가 잘리더라도 기어가야 하는 성격이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모순되게 만들었을까 여전히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나를 갈아 넣을 것을 너무나 잘 알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영적인 영역이라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하나님이 두렵고, 또 너무 두렵다. 그의 죄 사하심에 너무 큰 사랑과 동시에 짐을 느낀다.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그것과 반대의 행동을 할 때에 너무 강하게 의식된다. 내게 영적인 영역은 가장 실제적인 영역이다.

2. 생각보다 약했다
선교 단체, 청년, 만 명의 여름수련회, 기드온, 기타 등등 오늘날처럼 차가운 세상 속에서 길거리에서 예수를 전하는 청년들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CCC가 정말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모임인 줄로 알았다.
그런데 아뿔싸, 우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들의 집단이었다. 자신감 넘치게 자신의 무지를 뽐내는 사람들의 집단에 불과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의 감상은 그러했다.

얼마나 좌절했는지, 나 같은 신학 모르는 고졸에게도 충격이었는데,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우스울까 싶을 정도였다. 맞는 이야기는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되었고, 객관적인 분석은 우리가 기피하는 “효율적인 사역”으로 치부되고, 결국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판단이 선택되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내가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선호하는 까닭도 있다. 타당해야 하고, 보편적이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영역이 성경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그 반박 또한 성경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겨 그렇게 묵상하고, 준비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씀을 모르는 청년들의 집단은 그 한계가 명확했다. 설령 다들 은연중 동일한 생각을 했어도 접근 방식이 그들의 사각지대에서 오면 누가 이해할까.

3. 닿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어려웠던 건 역시 ‘동역자’ 들 간의 관계였다. 아무래도 청년 선교 단체의 한계를 마주하니 묵상을 나누어야겠다 생각했다. 내 묵상이 곧 내 생각과 행동으로, 그리고 사역으로 이어지니 말이다. 그런데, 결국 닿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설령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말에 관심이 없다. 교훈을 찾을 마음도, 뜻을 함께할 생각도 없다. 설령 대표단이라 하더라도 그런 마음가짐이 기본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과 같은 말을 해주거나, 그들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큰 감동을 주는 말들을 기억하지, 그 외의 것들이 아무리 유익하다 한들 결국 닿지 않는다. 그 사실을 크게 깨달았다.

나의 소통의 미숙과 더불어, 다른 이들의 대응의 미숙함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불만을 말하지 않았고, 다만 자신의 관심이 식는 것을 숨기고 있었다. 결국 영적인 영역에 대해 관심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겠는가, 당장 눈앞에 있는 ‘이번 주에 할 일’ 정도뿐 더하겠는가. 그런 악순환의 고리가 지속되었다.

다들 몰랐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관심이 식으면 왕래가 줄고, 왕래가 줄으면 우선순위가 줄어들고, 타인에게 짐이 과중된다. 자신에게도 이것이 칼이 되어 돌아오는데, 그 이유를 무관심이 끝까지 알지 못하게 한다.

4. 정신이 아팠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를 만드셨고, 사랑을 이루시려 자신을 배신한 미천한 피조물의 몸을 입고, 그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대신 죽어주셨다. 하나님에게 사랑이란, 관계란 정말 정말 중요한 것이었고, 너무나 마음 아파하신 영역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그래서 우리는 단절에 매우 크기 상처 입는다.

온 같 종류의 단절을 모두 경험하고 있었다. 가족, 친구, 의지했던 순장님들 등등. 사역 중 내게는 ‘내 편’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없었던 시간이 있었던 시간보다 더 길다. 내 의도를 알아주는 사람, 물어봐 주는 사람. 찾아주는 사람, 먼저 말 걸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도리어 가벼이 여겨지거나 무시당하는 일이 더 많았다.

특히나 내게 이것이 매우 치명적이었는데, 나는 심리적으로 도움이 매우 크게 필요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울증, 양극성 장애, 공황 등 좋지 않은 것들을 연달아 가져버린 상황이었고 특히나 전두엽은 치매환자 수준의 기능이었다. 그래서 특히나 아무도 매달릴 사람 없는 게 큰 상처로 남았다. 이 영역에서 가장 크게 실망하지 않았을까. 늘 답답해하며 눈물과 기도로 지냈던 기억이 난다. 함께 하려는 모든 순간이 비참했다.

그리고 그런 내가 좋은 말과 행동으로 도움을 구할 수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수 일을 굶은 성장기 어린이에게 당장 도움이 될 음식들이 눈앞에 있는데 음식들이 도망을 친다면, 그 아이는 화를 내지 언젠가 올 음식을 기다리지 못한다. 완전히 지치고 무너졌을 때, 그것이 자의라 부르기 어려울 때에서야 기다리게 될 것이다. 정신병도 똑같다.

물론 이 일련의 일들로 나는 우리 공동체가 “내가 아파요” 리고 말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길 바라게 되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 공동체가 그럴 수 있었으면 했다. 예수님께 병자가 몰려들었듯, 그리고 그들이 치유를 받았듯 관계의 회복으로 치유가 일어나는 공동체상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우리 대표단 순장님들이 한번은 공통적으로 ‘한 영혼도 놓치지 않는 대표단’을 비전으로 품는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나는 자신 있게 내가 그들 중 누구보다도 그 비전을 크게 품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5. 홀로 섰다
매우 강한 영적 압박, 책임감의 무게, 그리고 정신병과 지지기반의 부재,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서 받는 큰 상처는 나를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분명하게 내몰았다.

하루는 정말 죽을 작정을 했었다. 사랑방 뒤편에 작은 산이 있는데, 올라가다 보면 가파른 경사가 있는 곳이 있다. 거기서 강하게 앞으로 구르면 어딘가 걸리거나 강하게 부딪혀 죽지 않을까 했다.

3시간을 울면서 고민했는데, 결국 나를 품을 사람이 당장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살아나오게 했다. 흔히들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로 이인증을 뽑는다. 모든 것이 현실감 없고 자신이 타자처럼 느껴지는 병이다. 그때 내가 얼마나 불쌍하게 여겨지던지, 맛있는 거 먹이고 재우고 싶어졌었는데, 아마 그 상태가 도리어 당시에 도움이 되지 않았었을까.

이때의 자신에게 참 대견하게 느끼는데, 정말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도 잘 버텨낸 것이었다. 물리적으로도 혼자였고, 심리적으로도 혼자였는데 잘 버텨냈다. 공동체에서 도움을 찾지 못해 병원으로 찾아갈 줄 알았고, 사람들이 묻거나 들어주지 않으니 글로 쓸 줄 알았다. 그렇게 버텨낸 나 자신이 참 대단하다.

6.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매우 강한 의지를 보았는데, 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과학적으로 무언가 할 수 없는 상태였더라도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먼저 다가가 물어보고 해결하려 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매번 결과가 같아도, 나는 매번 다시 시도했다.

전두엽의 기능이 치매환자 수준이라 절제를 절대 못하는 상황에서도 참았고 기다렸다. 아무리 늦었다고 생각되어도, 안된다고 여겨져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지나온 이 모든 길은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 하나님께서 하셨다고밖에 말하지 못한다. 나는 포기치 않음으로, 포기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하나님을 찾음으로 그의 은혜와 기적을 누렸다.

그뿐만 일까, 포기치 않으니 나의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한둘 생겨 나와 함께 울어주었다. 용민 순장님, 석진 순장님, 찬우 순장님, 주원 순장님, 인하 순장님과 윤정 순장님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이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함께해 주고, 나를 위해 울어준 것이 내게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7. 소망
물론 나는 이제 염세적이고, 비난을 참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내 가슴에는 큰 소망이 불타오른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가는 예수 없는 집단이 아니라, “내가 아파요”라며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죄 고백이 스스럼없이 일어나는 진정한 회복 공동체를 나는 소망한다.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은 하신다. 다만 보편적으로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회복을 허락하신다.

8. 상처의 회복을 기다린다
나는 용서하려 노력하고 있고, 이제는 시야에 보이지 않는 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영역에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생긴 상처를 회복이 생각보다 더디다.

이것 또한 새로 알게 된 사실인데, 은혜는 은혜고 상처의 회복은 별개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요한 계시록에서도 심판과 구원이 있은 후에 눈물을 닦아주시지 않으시던가!

나는 여전히 우리 대표단을 생각하면 숨부터 막혀온다. 또 투명 인간이 되는 게 무섭다. 또 혼자가 되고 고민하는 게 무섭다. 남들보다 더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내게 상처 준 사람을 보면 많이 밉다.

그런데 나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이것은 용서를 넘어 축복의 증거이나, 나의 상태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를 반증한다. 언젠가 아물어 안아줄 수 있게 되고 싶다.


결코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내가 느끼는 만큼 당신에게 닿을 수 없겠죠. 감각기관이 우리 서로 너무 다른걸요. 그러나 제가 경험한 하나님은 정말, 정말 크십니다. 그의 사랑은 너무나 강렬하고 아름다워서 정말 소망 삼고 살아갈 때, 내 눈에 눈물이 흘러도 “기쁨”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너무 기분이 좋아 잠이 오지 않습니다. 너무나 후련한 마음에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음이 증거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굳세게 하시고 강하게 하셨으니, 이제 내가 어디서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

상하였으나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즉 무얼 두려워할까요?

아픔을 경험한즉 누굴 위하지 못할까요?

예수를 알게 된즉 어디서 살아내지 못할까요?

손에 못 자국을, 옆구리에 구멍을 두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를 통해 도마에게 부활을 증거하셨습니다. 나도 내 상처로 증거해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