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은 보고 듣는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관객은 관객이 청취하는 것이 글, 음악, 영화, 드라마 등 무엇이 되던 상관없이 작품에게서 영향을 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소비한다. 유희나 정서적 충족을 목적으로 작품을 소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관객이 그러한 목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소비할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영향을 주고자 작품을 제작한다. 즉 ‘작품’은 작가의 영향력 행사의 도구이며, 관객은 이 도구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일본 여행을 하고 있다. 여행 일정으로 그 유명한 고시엔에 방문하였다. 마침 우리가 방문하는 때에 고교 야구 대회가 있어 경기를 보게 되었는데, 경기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찍은 사진이 아래와 같다.

당시 경기 사진, 정말 막바지였다.
당시 경기 사진, 정말 막바지였다.

고등학생의 경기에 이만한 인원이 몰리는 것도, 경기의 승패가 이미 갈라져 유희로서는 더 이상 볼 이유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숨죽이며 경기를 눈으로 담고, 응원하고, 즐긴다. 이들이 공유하는 어떠한 ‘관념’(추억, 경험, 문화적 지식 등으로 빚어진)이 스포츠라는 매체로 ‘일체감’을 제공하고, 그 결과는 서로 깊이 공감하고 기뻐하는 정서적 채워짐과 유희로 나타난다. 이들은 그러한 결과를 알고 기꺼이 스포츠의 영향을 받아들인 ‘관객’이다.

부끄럽지만 처음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떠올렸던 생각은 “기껏 해봤자 고등학생들의 경기인데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정도였다. 하지만 곧 이들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어른들, 쉬지 않고 응원을 이끄는 학생들, 경기의 결과에 웃고 우는 학생들과 이들을 축하하거나 위로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아우러져 멋진 공동체성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 문득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이 사람들은 고교 야구 하나만으로 이렇게 하나 되는데, 왜 우리는 예수로도 안될까?”물론 오락과 신앙은 크게 달라 동일한 비교 대상으로 둘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야구와 예수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그리스도인을 비교하려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책을 바탕으로 ‘율법’이라는 토대를 만들어 변화하는 시대 속 유대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과거 여호와와 그의 선지자들이 이 세상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을 사전에 정의하고 대응 방법과 그 이유를 나열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렇게 했다고 한들 아무도 이해하거나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상상력과 믿음을 최대한 발휘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지침”을 만들어냈고, 이것을 율법이라 불렀다. 율법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으며, 악할 수 없다.(롬 7:12)

하지만 유대인들의 접근은 율법의 정체성을 크게 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아무리 거대한 상상력과 뚜렷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결정론적(원인과 결과가 모두 규명된) 접근을 할 경우, 필연적으로 사각지대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각지대는 오해, 의심, 그리고 악의적 남용을 야기한다. (마태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이혼에 관한 법이 그 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상황 중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하게 완성하셨는데(마태복음 5:17), 그의 방식은 더 많은 사례를 제시하고 꼼꼼한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비유와 성령의 임재를 통한 지혜를 허락하신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율법은 더 많은 규율이 아니라 능동적인 “성령의 인도” 라 표현하는 지혜가 적용되는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즉, 율법은 본래 하나님의 법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아 눈이 먼 우리에게 그 법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체화하는 것’으로 치환시키시는 은혜를 허락하셨다.


이 이야기는 얼핏 들었을 때 우리의 사정에 참 좋은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앎으로 인한 책임이 처음부터 우리가 감당할 만한 게 아니라서 살아내야 하는 책임으로 형태만 바뀌었을 뿐, 책임은 여전하며 더 이상 무지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결코 사정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은혜이며, 감사해 마땅한 일이다. 다만 그 이유가 단순히 “더 쉬워서” 가 아니다.)

선택된 소수만이 예배의 사명을 허락받았던 제사장의 때와는 다르게, 참 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모두를 중보하시기 시작하신 십자가의 때부터 오늘날은 우리에게 그 권능과 사명이 위임되었고, 그로 인해 더 이상 제사로 하나님의 임재에 기꺼이 참여하여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는 일종의 거래 관계인 얄팍한 ‘관객의 예배’에서 벗어나 ‘믿음’과 ‘인격적 교통’이 공존하는 삶을 통해 삶에서 율법을 체화하는 신일 합의, 즉 ‘성화’의 영역에 우리는 도달하게 되었다.

과거 ‘관객’처럼 대가를 지불하고 기꺼이 영향을 받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고뇌하고 투쟁하고 변화하여 성화를 거듭하는 뼈아픈 ‘이 땅에서 율법대로 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된 것이다. 능동적인 거룩의 실천이 우리의 책임이 된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아무도 결정론적으로 대답해 줄 수 없다. 누군가의 성화의 삶의 결과가 행동을 정해주는 신적 조언일 수 있다. (나오미, 모르드게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성화의 삶으로 나온 부산물일 뿐, 우리가 살아야 할 궁극적인 마침표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함께하는 제자들도 알아듣지 못할 비유로 말씀하신 까닭 중 일부도 이것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정론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다만 없는 것과 일어나지 않은 일로 설명하셨다.

예를 들어 오늘날 미디어 중독으로 고민하는 이가 성경에서 해결책을 찾는다고 가정하자. 과연 그의 성경책에는 예수님께서 “유튜브를 그만 보아라”라고 말씀하신 구절을 찾을 수 있을까? 다만 누가복음 21장 34절 등의 말씀을 상상력을 발휘하여 당장 자신의 상태에 적용해 볼 따름이다.
즉, 이처럼 능동적인 거룩의 삶을 말씀에 대한 지식, 허락된 상황, 그리고 적절한 상상력을 통해 거의 창작자의 영역에 다다른 채 살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창작물이 성화의 결과였는지의 진단은 마태복음 7장 16절에도 나와있듯, 열매로 알 수 있다. 그뿐일까, 누가복음 12장 51절에도 적혀있듯 우리는 ‘관객’들과 철저히 대립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유대 사회를 둘로 나누고 미움을 사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았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분쟁을 야기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복음 앞에서 행동 강령을 기대하는 ‘관객’으로 있을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며, ‘마음의 할례’이며, ‘성령 충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