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추가근무 할 때인가? 억울해서 추가 근무할 때를 찍었는데,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네요.


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내가 말이 많긴 한데….
글이 길긴 한데…


양자 컴퓨터 멘토링을 끝까지 붙드는 그
양자 컴퓨터 멘토링을 끝까지 붙드는 그

석진 순장님은 기회 한번 한번을 되게 귀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요. 덕분에 기회에 대해 고찰을 많이 하게 됐고, 이번에 일하게 된 것도 그 덕일지도요.


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아직도 퇴근길은 익숙하지 않더라고요. 서초구라 그런지 지하철 밖까지 줄이 있더라고요. 볼 때마다 공황이 와요. 그래서 저녁을 회사 주변에서 해결하고, 사람이 빠질 때까지 기디렸다 집에 들어가요.
오니기리와이우동? 무튼 그런 이름의 집이었는데, 협소한데 사람은 또 없어서 좋더라고요.


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폴 바셋이 타르트 맛집인거 알고 계셨나요?
갑자기 2년 전 쯤에 먹었던 기억이 나서 사봤어요.
그때만큼 맛있었는지는 모르겠네요
문득 서울대 사랑방이 그러워지는 타르트였습니다.


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아이 참.


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파스칼의 팡세를 샀어요.
팡세, 참 좋아하는 단어인데요,
단어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이 책이 걸작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아지네요.


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펜타 치즈 와퍼에 패티 추가해서 드셔보세요
진짜 하나님 일찍 만나는 맛


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1년은 사역하느라,
최근에는 일한다고 친구들이랑 놀지 못했어요.
잘 챙겨주지도 못하는데, 1년이 넘도록 게임 할때마다
못한다고 할걸 알면서도 물어봐주고,
몇번이고 약속을 미루고 취소해도 또 불러주는 친구들이에요.
또 때마침 마인크래프트를 한창 하고 있어서
같이 웃고 떠들던 고등학교 때가 떠오르더라고요.

이 친구들 덕분에 많은 고비를 넘겼었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따뜻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인수인계 받는 주원 순장님


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그리고 지금, 야식으로 국밥을 시켰습니다.


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생각할 겨를이 없는 편이 좋다
믿지 않는 제 친구들이 생각나는 파트에요.믿지 않는 제 친구들이 생각나는 파트에요.믿지 않는 제 친구들이 생각나는 파트에요.
믿지 않는 제 친구들이 생각나는 파트에요.

안셀름 그륀 이라는 카톨릭 신부의 책이에요.
그 내용이 참 좋아서 첨부합니다.

이 신부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가 주장하는 사랑은 인간적인 것을 초월하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위로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에요.
정말 참된 위로, 즉 신적인 위로는 인간적인 것 안에 있어요.
위로는 낙관적인(피안과는 다른) 믿음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적어도 지난 6개월 이상은,
너무 지쳐서 다른 사람들의 생일을 챙기길 그만두었어요.
제가 위로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위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위로가 신적인 것임과 동시에 내 안에 있다면,
‘위로 받지 못하는 것’과 ‘위로 하지 못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위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더욱 공감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걸 느끼기 싫어서
굳이 거듭 마음에도 없는 사과로 상대의 생각을 조작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해서 빨리 덮어버리려는 걸지도 몰라요.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이 제대로된 위로 받아본적 없어서
위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라 생각해요.

즉, 위로는 신앙과는 상관 없이
(물론 신앙의 성숙의 척도가 될 수 있겠지만)
받아본 자와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자 이외에는
줄 수 없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놀라운 은사가 아닐까 싶어요.
그게 저의 친구들,
그중에서도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있다는 사실이
제게는 그 증거에요.

저는 요즘 일에 몰두하다보면 점심 시간인줄도 모르고
집중하고 있는 시간이 길어요.
그만큼 제가 공상을 하고, 생각을 할 시간이 줄어들어요.
일상은 단조로워지고, 퇴근 후 걸으며 보내는 한두시간이
하루 중 가장 모험적인 시간이에요.

공동체를 벗어나 단순하고 단조로운 삶을 살게 되니,
비로소 피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내고 싶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새겨졌어요.
기복은 있지만, 아직 상태가 좋지는 않아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도 위로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책임과 결과를 통해 허락하신 보람을 맛보고,
세상의 덧없음과 사회의 차가움을 통해 소망을 기대합니다.

내가 받을 위로는 멀리 있지 않았고,
이제는 조금, 위로를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생각의 안개를 거두고 보니,
세상에는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 참 많아요.
안아줄 줄 알면서도, 그 힘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도 참 많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안겨야 하는데 자신도 그 필요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복음은 들이미는게 아니라
나의 품에서, 등에서 빛나게 해야 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헬라 문화권에서
무신론자로 여겨졌던 이유를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