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당신이 가장 의지하던 ‘영적 권위’를 소유한 사람에게 부정당했다 생각해 봅시다. 당연하게도 시험이 들 겁니다. 그런데, 왜 시험이 들까요? 왜 괴로울까요? 차기 대표단을 생각하며 공상하던 중에 문득 질문이 생겨 이에 대한 고찰을 해보았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각자의 ‘태도’ 때문일 겁니다.
영적으로 권위 있는 자에게 의지할 정도라면 분명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사역이나 일을 여럿 감당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사역과 일은 우리가 높아지거나 성과를 내는 자리가 아니라 다만 더욱 낮게 엎드려서 낮아지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낮아짐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궂은일을 도맡아 하기도 할 것이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봉사하는 이가 있을 수 있고, 시간과 자원을 쓰며 사람을 살피는 사람 등이 있을 테죠.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섬긴다’라고 말할 법한 대부분의 일들은 심리학적으로 우리를 불리한 위치에 두게 만듭니다.
크게 세 가지의 카테고리가 있다고 합니다. 반발 심리, 자아 위협, 역화 효과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자유나 통제권이 침해당한다고 생각되면 무의식적으로 반발합니다. 당신이 은혜에 겨워 ‘나눔’이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생각과 감정,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설명의 정도에 따라서 이것이 ‘나눔’이나 ‘정보 전달’이 아니라 ‘나를 통제하기 위한 강한 압박’으로 인지됩니다. 아무리 감동적이고 타당한 이야기라도 ‘자율성’을 위해 사람은 방어적 태도를 먼저 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반발 심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설명이 길고 상세해질수록 상대는 두 가지 불편함을 느끼고 자아 위협을 감지합니다. 먼저는 “내가 이걸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이렇게까지 설명하나?”라는 인식을 주어 상대방의 판단력이나 이해력을 무시하는 것으로 오독됩니다. 아는 걸 거듭해서 듣는 건 지치기도 하고요.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에서 설명하는 사람은 곧 우위를 선점한 사람이라고 인지됩니다. 즉, 스승과 제자의 관계성이 우리의 무의식중에 적용되어 불균형이 생기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어 마음의 벽을 만듭니다.
여기서부터는 역화 효과, 악순환의 시작입니다. 오해는 이미 생겼습니다. 나의 의도가 아무리 선하더라도 뜻과 의도가 곡해되고, 이것은 소통의 횟수가 많고 수평적인 역할을 지향하는 관계일수록 곡해의 정도는 더욱 날카로워지겠죠. 말하는 사람은 결국 오해를 풀기 위해 더 많은 증거와 명확한 논리를 들이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상대방은 자신의 원래 입장을 더욱 고수하게 됩니다. 나의 ‘선한 의도와 말’이 상대방에게는 ‘자신의 논리를 방어할 연습 문제’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즉 수고는 압박으로, 설명은 통제로 곡해되어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지식의 출처
[Brehm, J. W. (1966). A theory of psychological reactance. Academic Press]
[Nyhan, B., & Reifler, J. (2010). When corrections fail: The dynamics of partisan factual beliefs. Political Behavior, 32(2), 303-330.]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죄성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이만큼이나 유치한 사람들일 겁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우리는 나와 당신이 아무리 유치하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려 애쓰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이미 믿음이 생겨버렸는걸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공동체의 자리에서 필연적으로 받을 상처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치유해나가야 할지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묵상의 결과인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1. 예수님은 늘 먼저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항상 모든 일에 앞서 기도하셨습니다. 즉, 아버지의 뜻을 먼저 묻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문을 듣고 진리로 답하셨습니다.
1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였다.
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랍비여,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한복음 3장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셨고, 그렇게 드러난 그의 놀라운 영적 권위는 곧 니고데모가 그를 ‘랍비’라 부를 정도로 관계성의 불균형이 아닌, 온전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먼저 설명하지 않으시고 질문하게 만드시고, 진리로 답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믿음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1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마태복음 16장
예수님의 일하심에서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믿으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믿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적이나 놀라운 설교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만, 믿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끔 설명하기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했던 믿음의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3.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10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12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차고 남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3장
예수님도 분명 우리가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하길 누구보다 바라셨을 겁니다. 참하나님이시지만, 참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 고립감, 서운함, 서러움 등을 모두 느끼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이를 증언하지만, 예수님께서 말로 표현하신 때가 있습니다.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 마태복음 26장
찢어지는 마음으로도 우리에게 우리가 알아들을 만큼 설명 대신 빈 공간을 허용하셨습니다. 이해시키기보다 살아갈 방향성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해가 쌓일 것과 온전히 이해받지 못할 것을 인정하고 상대의 세상에 나의 세상의 것을 내 손이 아닌 상대의 손으로 두는 것은 답답하고 아픈 일입니다.
좋습니다, 우리가 설명하는 입장이 된다면, 내가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권위에 충실하게 살고, 그뿐 아니라 먼저 듣고 의도를 담아 대답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대가 스스로 도달하게 하고, 이 과정 가운데 느낄 쓸쓸함이나 외로움을 견디는 것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하기만 하지 않기 때문에 듣는 입장이 된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총 두 가지 정도로 귀결될 것 같습니다. 상대의 영적 권위를 존중하기, 핵심 의도를 알아보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실 때, 결코 아무나 세우시지 않으시며, 그냥 세우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을 신뢰하며 그를 신뢰하는 만큼이나 세워진 권위에 대하여 존중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수직적인 순종이 아닌 상호 간의 순종과 배려, 그리고 고찰과 소통이 필요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메시지와 메신저의 태도를 분리해서 듣는 훈련을 통해 상대의 핵심 의도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 부분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타고나기를 의도와 태도가 분리되지만 누군가는 노력해도 그렇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말이 길어진다는 것은 ‘대부분’ 반박하거나 면박을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상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자신의 에너지를 써가며 내게 전달해 준다는 것이거나 불안해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듣고 말하는 모든 영역에서 인내를 요구합니다. 목적 지향적 사고가 아니라 관계 지향적인 사고로 전환해야 하고, 치열하게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논할 만큼 우리는 고차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시대적, 문화적 배경으로 생긴 보편적 가치관과 각기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만의 세계의 법만 안 채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만으로 참 막막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실 때에는 더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사용된다는 놀라운 선물이며 하나님 임재 가장 앞줄에 놓인 ‘특등석’이지만, 세워졌고 세워질 사람은 그 순간부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모세는 아무리 잘하더라도 백성들에게 질타를 받았고, 예레미야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남유다의 영적 상태에 눈을 흘렸으며, 바울은 끝에 혼자 남았고, 그리스도는 구원 대상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각자가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을 보고 느끼고 애통하게 되고, 사람들 사이보다 하나님과 독대할 때가 편해집니다. 모든 것이 얕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풍성함을 항상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들의 오해가 기본인 죄성은 더욱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며 각기 다른 곳에 세워진 우리는 서로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각자의 고군분투 속에서도 서로를 위해 마음의 빈 방을 만들고, 애정 어린 수고와 진심이 오고 가는 이상적인 상황을 상상해봅니다. 내가, 우리 공동체가 이걸 참 잘하게 되었으면 하네요. 그럴 때, 세우심이라는 특등석이 정말 특등석처럼 느껴질 테니까요.
17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 히브리서 1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