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si deus non daretur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 본 회퍼의 옥중서신 중에서

사역을 거듭할수록 나는 우리의 태도에 좌절하게 된다.
우리가 기껏 해봐야 20대 후반의 대학생 집단이기에 더 그렇겠지만, 우리의 태도와 삶은 신앙·신학적 기준으로 더닝 크루거 효과에서 제시하는 ‘우매함의 봉우리’ 그 자체이다.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어디서 주워들은 짧고 편협한 지식의 조각, 그리고 출처 모를 신앙·신학적 취향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정답인 양 논하고 충고인 냥 판단하고 납득인 양 회피·무시한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더닝 크루거 효과)

무수히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제시한 신앙의 모델이 있고, 그 모델은 우리가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는 성서와 그들이 피부로 부딪히며 살아낸 삶으로 깎인 모습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같은 분이시며, 그분은 영원불변한 성품을 가지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알아낸 하나님의 속성과 그들의 방법론을 답습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사역 중 목격한 우리의 오류와 본 회퍼의 글을 도입으로 이용하여 글을 작성한다.

결국 하고픈 말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앞세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합리화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가 정말 살아내야 하는 모습과 태도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내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책임의 근거 : 책임≠속박 & ‘자유’의 진정한 의미

우선은 우리가 어째서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키셨기 때문에’ 정도로 일축할 수 있겠지만 이런 맹목적인 요약은 오해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그가 보기에 좋았던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다.(창 1:28)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족하시게끔’ 통치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우리에게 처음부터 기쁨과 사랑의 선물이 주어졌는데, 이걸 잘 가꾸는 건 당연한 처사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의 복음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직접 우리에게 부여하신 책임이 가려진다.
그리고 그 오해는 ‘자유’라는 단어에서 시작된다.
성경에서 ‘자유’를 이야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자유’해질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런데 속박 없이는 자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론가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우리가 얻은 그 ‘자유’가 어느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서 나오는 것인지 우리는 명확히 알아야 한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 로마서 8장

우리는 ‘죄의 법’ 즉, 사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자유해졌다고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칠 권리를 얻는 게 전혀 아니다.
오히려 죄에서 자유해졌기 때문에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만족하시게끔’ 세상을 통치한다는 힘든 업무가 생긴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신성한 일이다.

정리하자면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기꺼이 타인의 짐을 지고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능동적 자유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능동적 자유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우리에게 주셨던 그 책임이다.

책임의 형태 :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그런데 이 능동적인 자유(및 책임)는 신학적 진술로만 남아서는 안된다.
우리가 정말 이 자유를 살아내고 있는지는, 결국 우리의 구체적 태도로 증명될 수밖에 없다.
곁을 내어주는가, 필요를 채워주는가 — 이 두 가지 질문 앞에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1. 곁을 내어주기

우리가 너무나 못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보면 볼수록 챙기는 사람만 챙기는 우리, 결국 마음에 드는 사람만 예뻐해 주는 우리의 모습에
누군가는 진물이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 너무나 눈에 선하다.

32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33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 누가복음 6장

진실되게 곁을 내어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간과 재물이 쓰일 것이고, 필연적으로 부담이 되겠지만
죄를 그렇게도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우리가 감히 나의 호불호와 얄팍한 잣대로 누구는 품고 누구는 밀어낼 수 있겠는가?

2. 필요를 채워주기

야고보서에는 똑같은 이야기를 한술 더 떠서 그렇지 못한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 야고보서 2장

우리는 필요를 어떻게 채워줄 수 있을까?
우선은 피상적인 기도를 그만두어야 한다. 16절에서 야고보는 아주 명확하게 말한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도할게”, “기도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때때로 훌륭한 위로가 된다.
다만 그렇게 ‘말만 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에 깊게 뿌리박힌 ‘기도하고 통치는’ 무속신앙적 자기 위안’과 책임회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일인 것처럼 고민해 주고, 함께 웃고 울어주어야 한다. 나의 영역 안에 있다면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형제·자매의 모습이다.

만일 그래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알아서 해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는 질문하고 싶다.
“당신은 오늘 예수님이 직접 당신 앞에 오실 거라 생각합니까, 아니면 다른 신자를 통해 오실 거라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그 예수님은 지금 당신 안에도 계십니다. 가서, 당신의 호불호 밖 누군가의 곁이 되어주십시오.”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비유를 드는 이들이 있는데,
전형적인 표면적 묵상을 통해 타인을 판단하는 심판·정죄의 모습이다.
나는 꼭 그들에게 묻고 싶다. 내가 마르다이면, 그들과 당신은 마리아입니까?

여기까지 읽으면 ‘더 책임져라, 더 챙겨라, 더 채워줘라’라는 또 다른 무거운 짐으로 들릴 수 있다.
따라서 분명히 한다. 이 책임은 이미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분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에 가능한 책임이다. 다만, 이 글의 기조가 그렇듯 책임을 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분을 통해 우리에게 부여되었기 때문에 정말 제대로 해야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맡겨라”라며 무책임을 종용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하였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세상에 계시기 때문이며,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께 아무것도 맡기지 않고 혼자 아등바등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온전한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지 외면을 의미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1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2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여라. 너는 그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란 양 떼를 먹이는 사람들이 아니냐?
3 그런데 너희는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기는 하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는 않았다.
4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
5 목자가 없기 때문에, 양 떼가 흩어져서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모든 높은 언덕에서 헤매고, 세계 각처에까지 흩어지게 되었는데도, 그 양 떼를 찾으려고 물어 보는 목자가 하나도 없었다.

— 에스겔 34장

결국 우리가 처음에 짚었던 ‘우매함의 봉우리’는 신학책을, 성경을 더 읽거나 더 많이 안다고 해서 내려오는 자리가 아니다. 자기 자신만을 돌보던 에스겔의 목자들처럼, 실은 아무도 먹이지 않고 있었는지 모른다. 무지의 자각은 머리에서 오지 않는다. 모르는데, 어떻게 모르는 걸 알까. 곁을 내어주고 필요를 채워주는 자리, 그 낮은 책임의 자리에 설 때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몰랐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하면서도, 동시에 그 어느 곳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가장 분명히 일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되는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