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생활은 [열심 → 낙심 → 깨달음]의 3단계 사이클이 반복된다.
다들 그렇겠지만, 경우가 다 다르니 글로 남겨보고자 한다.
매번 낙심할 때마다, 한 권씩 신앙 서적을 읽을 기회를 하나님께서는 제공해 주신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고, 두 번째는 교양 수업 교수님의 요구 때문이었고, 그 후로는 선배 순장 님의 추천, 그리고 이번에는 선물이다. 이번에 읽게 된 책은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 칼뱅 - 1541년 프랑스어 초판 번역본이다.
일상적으로 하던 말씀 묵상과, 나의 경험, 생각과 감정, 설교와 주변인들의 말이 모두 한곳을 가리키고 있던 와중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이 책과의 만남에서 그 내용조차 내게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 기도에 관한 부분에서 내게 가장 큰 찔림이 있어 이를 나누고자 한다.
1. 기도의 유익
기도는 우리에게 몇 가지 유익을 제공하는데,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기도는 우리에게 주님을 안식처 삼는 습관을 가져다줄 수 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자비로 주어지는 선물은 기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알아야만 진정으로 누릴 수 있다.
세 번째,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음을 알고 받는 것과, 그의 때를 기다리고 알게 되는 특권이다.
네 번째, 위 유익들을 누릴 때, 우리는 이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2. 대화로서의 기도
경건과 겸손 : 기도의 모든 영역은, 하물며 개인적이고
순간의 필요에 의한 간구조차 그 중심이 하나님께로 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신자는 자신의 죄성에 대하여서 인지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한 애통함과 탄식함이 있어 겸비하여야 한다.
정직하게 모든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용서의 확신 : 그럼에도 기도할 수 있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신자는 모순적이게도, 자신의 죄성과 하나님의 시점에서의 의인됨을 인지하여야 한다.
(simul iustus et peccator)
“나는 죄가 없어요!”의 태도가 아니라 자비와 약속을 온전히 믿고
그 믿음을 기반으로 자신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올바르게 알 수도 없지만
다만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기도로 보여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의 공로가 주가 되지 않도록 철저한 자비의 인지가 필요하다.
열정 : 정직함은 추악함을 위탁하는 것이 아니다.
온갖 추악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만족하는 것은 모독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우리의 죄성의 괴리가 기도의 원동력이 되어,
날마다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강한 열망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의 이름
우리는 위 기도에 대한 근거를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그리고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로 알 수 있다.
기도의 명령을 아버지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는 것으로 기도하고,
그 약속과 명령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었고, 이것은 특권이다.
그뿐인가, 우리의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가?
그러니 애통하되 담대히,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그 기도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참고 구절 : 욜 2:32, 롬 8:26, 단 9:18~19, 사 64:5~9, 렘 14:7, 요일 3:22, 렘 29:13, 마 7:7, 눅 11:9, 출 20:7, 삼상 15:22, 창 32:9~12, 요 14:13, 롬 8:34
TMI + 묵상
지난 주, 나는 오랜만에 바닥을 경험했다.
우울증 약을 몇 번 거르게 되었는데, 그 때문인지 약 이틀 가량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했다.
내게는 안전장치가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늘 편히 있지 못하고, 마땅한 정서적/감정적 지지기반이 없는 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감당하니 날로 정신적인 괴로움은 심해져 이제는 노이즈 캔슬링이 없으면 버스를 타는 것도 초조하고 불안할 수준이다.
감정적 소모가 극한에 도달하면 두뇌는 그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무감각을 택하고는 한다.
그것이 최근 몇 주간 나의 상태였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 펑펑 울고 싶은데, 울기 직전에 가슴이 급격히 차가워지고 눈물이 흐르지 않고 고스란히 목구멍에 내려앉아 쌓여가는 기분을 몇번이고 느꼈다.
상처받고 공허한 마음에 하루에 6~8시간씩 새벽까지 PC방에서 지새웠으며, 거룩하지 못한 분노가 가득한 시간을 보냈다.
이 응어리들이 녹아내린다면 재앙이 될 것 같아 인지적으로 모든 것을 사전에 정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기도보다 확실한 정리가 있겠는가, 나의 모든 상태를 두고 정말 진솔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기도를 적는 편이다. 짧은 작업 기억과 낮은 청각 주의집중력으로 인해 적는 것이 더욱 진실되기 때문이다.
덤으로 기록된 기도를 통해 응답 여부를 곧바로 알 수 있다.
그렇게 적어나가던 중, 나의 고백의 문장을 보았을 때에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어쩌면 웃음이 나올법한 상태가 적혀 있었다.
그때 문득, 하나님께서 내가 이런 모습마저 올려드리길 원하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저를 바라세요?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시는 거예요?”
나의 반응은 그러했다. 내게 정말 큰 충격이었다.
우리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각자가 경주를 마치기 전까지 절대 하나님을 올곧게 알 수 없다.
하물며 그 경주 중에도 누군가를 판단하고 분노의 대상으로 삼기 일쑤다.
그럼에도 신비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성령의 일하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뒤틀리고 어긋난 열심이 결국 하나님을 향하게 하심을 목도하게 된다.
동방 정교회 신부 세라핌 로즈는 그의 저서 《God’s revelation to the human heart》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를 받아들이는 특별한 기관(장기)이 있을까요?
네, 보통은 우리가 닫아두고 열어두지 않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바로 ‘사랑하는 마음(loving heart)’이라는 곳에 주어집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기형적이고 뒤틀린 사랑밖에 하지 못하지만, 그나마 그 방향이 하나님이고자 한다면, 그마저도 사용하셔서 우리의 수준에 맞추어 성장케 하신다.
어김없이 하나님께서는 강한 위기감을 허락하셔서 그로 인해 잠에서 깨어나게 하셨고 나로 묵상케 하셨다.
나의 마음이 굳게 두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억지로 순종하였더니 놀라운 회복을 경험하고 있다. 분노는 미안함, 애통함, 간절함 등의 마음으로 승화되었고 공허함은 열정과 갈망으로 채워지고 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죄인이라, 이 회복의 손길을 올곧게 해석하지 못할 것이다.
보여주신 사랑을 동일하게 살아내지 못할 것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내 앞에 당당하게 서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내 안에 솜뭉치 하나 들어갈 만큼의 여유도 없다.
그럼에도 나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강한 갈망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보호될 것이며,
그 모습에 걸맞게 나 또한 다듬어질 것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나를 위해 기도를 부탁한다.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해주시는 영역들을 두고 기도해 주길 바란다.
특히나 하나님의 평안으로 말미암은 넉넉한 여유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도와주시길 그리스도께 아뢰어주시길 소망한다.
나는 진정으로 이 시간들이 변명거리가 아닌 보물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나 또한 모두를 위해 그리할 테니.
그럴 때, 우리 모두 샬롬을 누릴테니!
언젠가 당신의 낙심도, 회복도 내게 들려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