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달할 수 없는 낙원 아르케디아, 상실의 아케디아에 대한 팡세이다.

원어적 해석

아케디아 : ἀκηδία = ἀ(A_없다, 아니다) κηδία(Kēdos_돌봄, 염려, 무거움)

  • Kēdos는 장례를 치르지 않는 것에 대한 표현(패륜적 무관심, 가장 중요한 의무를 져버린 상태)을 의미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으며, 기독교적 표현으로는 영혼에 대한 방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 Kēdos는 또한 슬픔과 비탄이라는 뜻 또한 포함되어 있다.

무감각하면서도 (잘못된) 슬픔에 잠식된 상태, 걱정을 거부하여 오히려 무기력해지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해석의 역사

에바그리오스 폰티쿠스 (A.D 345~399)

수도자였던 에바그리오스 폰티쿠스는 시편 91편을 인용하여 아케디아를 표현하고자 했다.

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 시편 91편

폰티쿠스가 사용했던 성경은 70인 역이었다.
70인 역에서 위 본문의 재앙을 한낮에 닥쳐오는 마귀라 표현하고 있는데
그는 수도사 생활에 극도의 권태감을 느낄 때 이를 인용하였다.
영적, 심리적 고통이 가장 극심할 정오(가장 뜨겁기에)에 찾아오는 것으로 설명하였으며,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 체감은
“하루가 50시간은 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거나, “동료 수도사들을 불쾌하고 무식한 사람들로 여기게 만든다.” 라는 등의 체감을 기록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 (A.D 1225~1274)

“Acedia is tristitia de bono spirituali” (아케디아는 영적 선에 대한 슬픔이다.)

아퀴나스는 아케디아를 하나님의 사랑(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것을 부담이나 슬픔으로 여기는 상태라 여겼다.
그렇기에 그는 아케디아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명을 감당하기 싫어 주저앉는
영적 무기력이라 보았다.

반 그리스도적 도피성, 아르케디아

아르케디아, 고립되었거나 도달할 수 없는 낙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종의 아르케디아를 바란다고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하지만 그리스도께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딜레마를 유한성을 가진 인간이 무한성에(아르케디아) 몰입하여 그 괴리를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라 말하며 이를 절망(아케디아)이라 주장하였다.

1월 16일,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는 어제의 일이다.
필리핀 단기선교 중이었기에 CPU 캠퍼스에서 만난 전자전기 공학부 1학년 Vohn과 순모임을 하던 중, 그가 물었다.

“어차피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더라도, 죄를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또 죄를 짓게 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모든 행위와 믿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깊은 아케디아에 빠져 있었다.

사랑, 체험, 이해, 유비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에베소서 2장

은혜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가 알만한 수준으로 보여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어떠한 ‘도’를 깨달아 은혜를 입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입는 것이다.
우리는 받은 존재이지, 드릴만 한 존재가 아니다.
무한자를 향한 몰입은 곧 갈망으로부터 난 것이며, 그 갈망을 행하는 것은 죄이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창세기 3장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 시편 27장

135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 시편 119장

무한자를 향한 갈망 자체가 죄가 아니라 주장할 수 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또한 무한자를 향한 갈망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에 드러난 갈망은 교만으로서의 갈망이나,
우리의 본성으로서의 갈망은 우리가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본성으로서의 갈망은 거스르는 결과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결과를 제공한다.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립보서 2장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갈망이 채워지지 않은 채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는 친히 종의 형상을 취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섬기셨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히브리서 4장

그뿐만 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느끼신 아케디아를 관상하신 것이 아니요,
필히 체험하셨으리라. 그런 그가 우리에게 우리의 아르케디아를 향한 갈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여 주시지 않으실 리가 만무함을 나는 믿는다.

메타노이아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 마가복음 1장

회개, 원어로 Metanoia(μετάνοια)이다.
Meta (μετά) : 넘어서, 변화, ~후에
Nous (νοια) : 마음, 지성, 정신
의 의미를 가진 단어의 합성어이다.
회개는 메타노이아이며, 메타노이아는 마음과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아르케디아는 먼 고지가 아니다.
도리어 그 아르케디아가 내 안으로 오셨고, 내가 서 있는 곳이 아르케디아의 영토이다
나의 자리가 아무리 누추하더라도 말이다.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고린도전서 15장

이미 아르케디아는 우리의 것이며, 다만 그의 때에 온전한 몸의 부활과 영의 부활로 우리가 지금 알지 못하는 것을 오해 없이 알게 될 따름이다.

이제는 유한함 속에 무한함을 담는 것이 아니요, 무한함 속에 나의 유한함이 담기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메타노이아이며, Vohn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