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표단 내에서 함께 TCI 검사를 하였다.
TCI 검사는 기질 및 성격 검사로, 타고나는 기질과 후천적으로 구축되는 성격을 자기보고형 검사를 통해 수치화하는 검사이다. 우선은 나의 검사 결과를 보아야 한다.
| TCI-RS | 척도 | 원점수 | T점수 | 백분위 |
|---|---|---|---|---|
| 기질 | 자극추구(NS) | 52 | 64 | 90 |
| 기질 | 위험회피(HA) | 38 | 48 | 42 |
| 기질 | 사회적 민감성(RD) | 57 | 61 | 84 |
| 기질 | 인내력(PS) | 50 | 55 | 69 |
| 성격 | 자율성(SD) | 24 | 32 | 4 |
| 성격 | 연대감(CO) | 74 | 71 | 98 |
| 성격 | 자기초월(ST) | 54 | 72 | 98 |
| 성격 | 자율성+연대감(SC) | 98 | 50 | 49 |
위 결과는 대학생을 준규 집단으로 두었을 때에 기록되는 결과이다.
담당 간사님의 말씀으로는 점수가 85점을 넘으면 지나치게 높은 것이라 말씀하셨다.
각 척도는 그 명칭대로 해석하면 안 되기에 간사님께서 설명하셨던 엄밀한 기준을 나열하겠다.
(이걸 다 정리해둔 DS 박인하 순장님 감사합니다.)
기질
- 자극 추구 :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느끼며 시도해 보는 성향
- 위험회피 : 위험이 예상되는 상황을 경계하고 피하려는 성향
- 사회적 민감성 : 감정에 민감하고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 하는 성향
- 인내력 : 곧바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행동을 꾸준히 지속하는 성향
성격
- 자율성 : 주도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정도 (간사님께서는 ‘나’를 대하는 태도라고 하셨다)
- 연대감 : 관계에서 다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고 조화롭게 지내는 정도
- 자기초월 : 정신세계에 몰두하거나 우주 만물과 일체감을 느끼는 정도
각 척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두고 나의 결과를 판단해 보았을 때,
도전적이며, 사회성과 영성에 민감하고, 평범한 수준의 위험회피와 인내력, 그리고 자율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각 척도는 여러 하위 척도의 도합이기 때문에, TCI 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를 참고해야 한다.
나의 하위 척도에서 스스로에 대한 일관적인 패턴을 찾아낼 수 있었는데 아래와 같다.
- 내가 자율성이 매우 부족하고 자신보다 타인을 우선시한다. (그러면서 또 사람에게 의지는 안 한다. 이거 완전 정병 기질 아닌가;;;)
- 본래 나는 목적성과 야망이 매우 낮은 사람이고, 그러면서 동시에 분명한 이상을 갖고 있어서 스스로를 불만족스러워하는 사람이다. (자기수용 0, 자기일치 2)
선교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굉장히 유리한 기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각자 다르게 지으셨고, 각자의 방법대로 빚어가시며 천국에서는 온전해진 ‘나’로서 있게 하실 텐데 내가 ‘나’를 죽이고 공동체로만 내면을 채우는 걸 좋아하실리 만무하다.
이는 자아를 죽이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가 나에게 부여하신 색채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자아와 당위성을 구분 짓고 나의 형질은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에, 그리고 자아는 하나님 앞에서 섬김으로 빚어져 가는 것에 맡기기로 했다.
더 나아가서, 나는 위 하위척도에서
- 성취에 대한 야망 (PS4)
- 목적의식 (SD2)
의 두 분류를 중점으로 내가 신앙을 기반으로 한 당위성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지,
어떻게 야망에서 소망으로, 목적의식에서 실상으로 치환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고민 끝에 다다른 결론인 종말론적 실천주의라는 관념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종말론은 그 어감 때문에 절망적 묵시와 비슷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의 종말론은 굉장히 낙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종말론이란 세상의 끝을 기다리며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로 인하여 모든 것의 궁극적인 완성이 곧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이다.
따라서 종말론적 관점은 늘 도래할 나라의 가치를 미리 살아내는 것이라는 결과만 도출할 뿐이다.
꽤나 낙관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종말론적 실천주의는 그 가치를 세속에서 살아내는 것에 대한 방법론 내지 위계질서 체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야망과 다르고, 목적의식은 또한 어디에서 어디로 부여되는지 자명하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설령 나와 같거나 비슷한 ‘종말론적 실천주의’를 살아내고자 하는 사람들마다 그 대답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나의 나름대로의 대답을 해보고자 한다.
-
종말론적 실천주의는 야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성실과 믿음, 그리고 그에 따른 가시적인 결과만 있을 뿐이다.
이는 야망이 동기라면 ‘나의 성공’을 두고 결과에 집착하게 되는 반면, 종말론적 관점이 중심인 사람은 그저 최선을 다하여 힘쓸 뿐이다. 이는 종말론적 관점이 이미 완성을 유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종말론적 실천주의를 따른다면 목적의식은 하나님 나라의 성취, 혹은 능력의 경험(영적 체험)과 이를 통한 영성(전인격적 성화)의 성장이 목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실천의 방향이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소외된 이들과 미움받는 이들, 타인과 공동체를 향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가장 어렵다.
나의 이상이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일까, 자존감이 낮아서일까 그 원인은 명확히 모르겠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격이 없음에도 섬기고자 하는 것이고, 엉망이어도 끝까지 자리를 내려놓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섬기되, 다만 주신 것들의 방향성을 그에게 돌렸을 때에 나오는 태도로 섬길 것이다.
이제는 형질상 스스로에게서 찾아지지 않는 의미를 종말론적 신앙에서 찾을 것이다.
이미 다 이루셨고, 장차 이루어질 약속과 예언이 믿음의 실상으로 주어졌으니 진실로 그리 믿는다면 응당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세속에서도 살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의 장작이 나의 열의나 열심이 아니라 다만 믿음이었고, 진작 내게 주어져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나는 진실로 진실로 영적 소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