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ul iustus et peccator(의인이면서 죄인) — 루터가 외쳤던, 그리스도인들이 안고 살아가는 모순을 아주 잘 표현하는 문장이다. 진실로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모순을 안고 살아간다.

어제 채플에서 돌아오는 길에 정우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심리상태는 나와 매우 닮아있어서 그의 마음과 생각에 정말 공감이 되었고, 내게 솔직하게 나누어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2024년에 정우를 아들 순원으로 만난 것이 내게 큰 축복이다.
그의 이야기를 내가 멋대로 할 수 없으니 그에게 들려주었던 나의 이야기를 발전시켜 적어보고자 한다.

최근 기존에 복용하던 약물의 복용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다른 요소를 노리는 약을 추가로 처방 받았다.
특정 증상을 타겟팅한 일종의 트레이드 오프였다.
트레이드 오프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단일 집중력이 올라갔고, 청각 주의집중력이 상당한 수준으로 좋아졌으며, 기억력의 증가또한 느낀다.

다만 평소보다 분노가 많아졌고, 단일 집중력은 높아졌지만 산만해졌고,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10~20분 가량 늦춰지는 등 내면과 행동양식에서 기존에 복용하던 약물의 용량 부재를 크게 느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내재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능력을 바랬건만 내게 남은 것은 약물의 보조 없이는 이상에서 더욱 멀어지는 나를 발견했다.
성령의 형질은 마치 바람과 같아서(요 3:8) 내가 그의 일하심을 알 수 있을리 만무하지만 약물에 따른 변화가 너무 크게 느껴지는 지금은 무엇을 원하시는지, 어디로 인도하시는지 알 수 없어 참 답답하다.
그럼에도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소망을 두는 것은 마땅히 소망을 둘 곳이 없어서일까, 혹은 내가 진실로 그를 신뢰하는 까닭일까. 나도 나의 의지를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적 관점에서 보자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종교 개혁자요, 사회 운동가이다.
그는 희망이 없을 정도로 척박한 곳을 스스로 향하셨고, 사회의 식탁에서 쫓긴 이들과 함께 드셨으며 (막 2:16),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막 15:27)
따라서 그를 본받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따라 마땅히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해야하며, ‘섬김’이라 일컫는 일을 하여야 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사랑이 있는 자라면 응당 그리하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리하고 있는가?
분노를 품고, 미움을 갖고, 판단과 정죄와 거짓과 음란을 일삼고, 헌신 대신 편의를, 사랑 대신 애정을 갈구한다.
나의 사랑의 지경은 좁고 너무나 좁아서 나의 가족, 공동체를 넘는 사랑을 하기가 너무 어렵다.
어거스틴의 주장대로 사랑이 하나님을 비추는 창구라면, 나의 창구는 교도소 독방의 창구보다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입었고, 앞으로도 입을 것이다.
이 사실이 나를 미치게 한다.

정우와 나는 일생의 대부분을 타국에서 살아온 이른바 ‘검머외’이다.
우리 공동체 내에서 타국에서 온 이들도 이를 농담으로 소비하며 웃어 넘기지만 검머외로 불리우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같이 큰 구멍이 있다.
이는 정우도 동의한 바로, 우리는 우리가 살았던 곳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결국 이방인임을 확인받을 뿐이다.
스스로가 이방인임을 잊은 채로, 그 때와 장소와 사람이 아니고서야 재현할 수 없는 정서에 익숙해져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지내다 갑작스레 다른 환경으로 방생당했다.
결코 작지 않은 두려움, 혼란, 외로움이 가슴을 후벼파고, 그 중 외로움은 결코 그 정도가 줄어들지 않고 다만 스스로가 무감각해질 뿐이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결국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나의 자리’라고 생각했던 곳으로 돌아가면 그 자리가 기억과 다르고 이제는 형태마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남는건 사람, 공동체, 신앙 뿐이다. 그것이 방생 후의 우리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그것이 전부이다.
철저히 타자에 의해 정의되는 나,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영역은 하나님 앞 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진실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기 좋은 환경이다.
나의 믿음의 분량이 작아 이렇게 내몰리지 않고서야 믿지 않기 때문이리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여전히 인간적이어서, 가슴에 생긴 커다란 구멍을 메우고자 하나님 이외의 것에 알지도 못한 채로 끌려가기도 한다. 치밀하게 중심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내가 이로 인해 믿음을 지킬 수 있음이 감사하면서도 여전히 달갑지 않고 버겁다.

결코 내가 안고 살아갈 모순이 가장 힘든 모순도 아닐 것이고, 다른 이들의 모순이 가벼운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해 슈바이처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호숫가를 따라서 그분은 이름도 없고, 나이도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오신다.
그분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그분은 우리 시대를 위해 하셔야 할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다. 그분은 명령하신다.
순종하는 이가 지적인지 단순한지 여부와 상관 없이 그분은 투쟁과 갈등과 고통 속에서 자신을 보여주신다.
그분과 우정을 맺으면 그 투쟁과 갈등과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러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써, 그들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상처가 많아서 좋다.
나는 당신이 상처가 많아서 좋다.
그리스도의 교회는(위클레시아로서) 서로가 서로의 아픔과 찢어져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마음을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폭력적인 인정이 아니라
사랑을 근간으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사랑하고자 노력하며,
하나님의 놀라우신 치유의 역사하심을 마주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나 모순적이며 아름다운가!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가슴 아픈가!